한국의 환자와 의사는 아무리 획기적인 신약이라도 빨리 만날 수 없다.
제약사들이 약값 박하게 주기로 유명한 한국을 차치하고, 다른 나라에서 약가를 다 받은 후에야 국내에 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국에서 아무리 낮게 받더라도 주변국들의 약값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최근 발간한 '2015 식품의약품통계연보'의 '세계 상위 10개 의약품 매출 현황'은 이 같은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전세계 매출 3위에 이름을 올린 C형간염 치료제 '소발디(길리어드 사이언스)'는 지난해 무려 11조 544억원(94억달러) 어치를 팔았다.
소발디가 출시 2년도 안돼 전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처방된 이유는 단 하나, 치료효과 때문이다.
소발디는 C형간염 완치시대를 연 혁신적인 신약이다. 부작용이 심한 주사제 인터페론을 쓰면서 60~70%의 치료반응률에 만족해야 했던 환자들이 경구제 소발디를 만나 99%의 치료효과를 경험하게 됐다.
소발디를 리바비린과 병용해 3개월 복용하면 반응률(SVR)이 97.1%에 이르고, 6개월이면 99% 환자에서 혈청 내 HCV RNA 수치가 미검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소발디가 국내에서는 지난달 10일에야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
허가를 받아도 약가협상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속타는 건, 기존 치료제로 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경쟁약물이 커버할 수 없는 유전자 2형 환자들, 재료를 눈앞에 두고도 쓰지 못하는 의사들이다.
제약사들이 전세계를 돌고 돈 다음 한국에 출시하거나 아예 국내 시장을 포기하는 사례는 예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약가인하를 몰아치며 보험재정을 긴축 운영한 지난 몇 년간 더 심해졌다.
얀센이 SGLT-2 억제 계열 당뇨병 치료제(제품명 인보카나)의 허가를 받고도 출시를 포기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한 다국적 제약사의 대표이사는 "전에는 본사도 한국 시장에 빨리 출시하려 했다. FDA에 허가신청하기 무섭게 한국 식약처에 신청했다"면서 "그런데 지금은 남미 국가보다 늦게 출시하려 한다. 정말 자존심 상한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다국적 제약사의 PM은 "제약사도 이윤추구 기업이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약가 마지노선이 있다. 본사의 지침과 기준이 있는데, 한국에만 특별한 상황을 적용하긴 힘들다"면서 "결국 한국 시장을 포기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임상 현장에서 신약을 가장 먼저 만나는 교수가 느끼는 답답함은 크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보영 교수는 "지금 한국은 재료가 있어도 쓰지 못하는 원시적인 치료 현실"이라며 "겉으로는 예방을 그렇게 중시한다고 말하면서도 신규 항응고제를 자유롭게 쓸 수 없도록 묶어 놓아 결국 많은 뇌졸중 환자를 발생시켰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신의료기술의 도입도 가장 늦다. 5~6년 전만 해도 중국 의사들이 우리에게 배웠는데 이젠 우리가 중국에 가서 배워오는 실정"이라며 "국내 의료가 점점 퇴화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댓글보기(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