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 붕괴, 정책 설계 한계가 근본 원인…수가·재정 개편 없는 해외모델 도입은 혼란만 가중
진료량 기반 수가체계·수도권 쏠림 구조 탓에 지역의료 붕괴…정부 대책, 방향성만 있고 구체적 청사진 부재
강원특별자치도 조희숙 공공보건의료지원단장. 사진=대한민국의학한림원 유튜브 생중계
[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지역의료 붕괴의 원인이 의사 수 부족이 아니라 잘못 설계된 의료시스템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료량 중심의 수가체계, 수도권 중심 정책, 단일보험 구조, 지역 완결적 진료체계 부재가 누적되며 지금의 위기가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이에 정부는 해외 제도을 벤치마킹하는 등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해외 사례를 단순 모방하는 정책은 반복 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1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지역의료 생태계 구축을 위한 해법 모색' 미디어포럼에서 강원특별자치도 조희숙 공공보건의료지원단장, 대한의사협회 우봉식 전 의료정책연구원장, 의학한림원 박은철 부원장, 대한예방의학회 강동윤 총무이사는 지역의료 붕괴의 원인과 해법에 대해 논의했다.
"진료량 기반 수가, 수도권 중심 정책 등 처음부터 지역의료 불리하게 설계됐다"
조희숙 단장은 지역의료 붕괴는 의사 수 부족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의료시스템 전반의 설계 실패가 만든 구조적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수도권 중심 개발, 광역 교통망 확대, 진료권 폐지, 실손보험 확대 등 수십년간의 정책·환경 변화가 환자와 의료인력을 수도권과 대형병원으로 이동시켰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진료량 중심의 수가체계 문제를 언급하며 지역의료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지역은 인구 감소, 중증환자 진료역량의 한계, 의료인력 이탈이 겹치며 진료량이 구조적으로 적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료량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수가 구조는 지역 병원에 불리한 구조를 고착시켰다.
조 단장은 "현재 정부는 지·필·공 공약을 비롯해 여러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여러 방향성을 제시했고, 방향성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청사진은 제시되지 않았다"며 "지역필수의료 기금에 대한 특별회계 만드는 것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복지부에서 늘 했왔던 관행처럼 기금이 쪼게지고, 사업 형태로 내려오면 에너지 누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수가 조정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국고 기반 투자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도권에서 건강보험료를 낸 이들이 그 돈을 다른 지역에 쓰는 데 동의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건강보험 기반에서 수가만으로 지역완결적 진료체계를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는 "건강보험 내에서 의료이용과 수가구조를 재설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투자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며 "그러면 지역에서는 국가의 투자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박은철 부원장. 사진=대한민국의학한림원 유튜브 생중계
"해외 정책 단순 도입은 주의해야…지역의료 문제 해결 안 돼"
이어진 발표에서는 해외 정책을 그대로 한국에 도입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봉식 전 원장에 따르면 미국·호주·영국·일본·독일 등 주요 선진국은 지역 의사 유치를 위해 재정 인센티브, 지역 의무복무, 비(非)의사 인력 활용, 원격의료 등 다양한 정책 패키지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유인책이 동원됐음에도 지역의사 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국가는 드물었다.
그는 각국의 정책은 광범위한 무의촌, 낮은 의료 접근성, 지역별 자치 재정 활용 등 한국과 전혀 다른 조건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한국처럼 이미 의료 인프라가 갖춰진 곳에서 해외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면 오히려 기존 체계를 교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한국의 특수한 구조적 문제로 단일보험 구조와 당연지정제를 꼽았다. 지역에서 재정을 책임지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보니 의료자원을 유지할 유인이 없고, 환자와 의료 인력이 수도권으로 이동해도 지역 의료로 재투자되는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 전 원장은 "대부분 국가는 지역에서 재정을 관리하고, 아끼면 지역 주민에게 리워드를 주는 구조가 있지만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현재 제도에서는 지역의료가 지속가능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은철 부원장은 공공의대가 지역의료 인력 문제를 해결할 현실적 해법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공의대 신설에는 부속병원 건립과 전문의 수련 인프라 구축 등 막대한 예산과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효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일본과 대만의 공공의대 사례를 소개하며 사실상 두 나라 모두 공공의대 정책에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박 부원장은 "대만은 중앙정부가 사람을 뽑고 일본의 자치의대는 지방 현에서 돈을 주고 배치도 직접했다"며 "이 때문에 일본의 의무복무 완료율은 98.5%에 달했다. 의무복무 종료 후 지역유지 비율 역시 2006년 68.8%, 2025년 68.3%로, 대만의 2017년 16% 대비 훨씬 높았다.
이어 그는 "일본의 자치의대는 숫자로만 보면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실패했다. 자치의대를 나온 의사는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고 말했다.
박 부원장은 두 나라 모두 동일한 의무복무형 지역의사 양성 모델을 운영했지만, 제도의 성패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각국의 지리·인구·의료 접근성 등 구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공공의대 신설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지역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진료권 설정, 환자이송체계 정비, 지방 거점병원의 역할 강화 등 구조적 개편이 우선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 부원장은 "기존의 지역인재전형, 계약형 지역필수의사제, 시니어의사 지원, 공중보건의사제도 등과 비교했을 때 비용·효과·시기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공공의대 설립에는 의대 건물, 부속병원, 전문의 수련체계 등 막대한 예산과 충분한 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대한예방의학회 강동윤 총무이사. 사진=대한민국의학한림원 유튜브 생중계
"디지털헬스는 도구일 뿐… 지역의료 문제는 의료자원의 효율적 배치 등으로 해결해야"
예방의학회 강동윤 총무이사는 디지털헬스 기반의 예방중심 의료 전환을 필요하다면서도 디지털헬스가 의료체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핵심으로 인지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이제 우리는 메디컬 케어를 넘어 헬스케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예방중심 의료의 전환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헬스는 데이터를 정보로 변환하는 진료 보조도구로, 비용·효과 측면에서 전통적 의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데이터에 대한 검증과 AI가 내린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 소재가 모호하다"며 "현행 수가체계는 데이터 검증과 지속적 건강관리 행위를 보상하지 않는다. 여러 시도가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해외에서 성공한 디지털헬스 모델 대부분이 수백 킬로미터 단위의 무의촌 원격진료 모델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KTX로 3시간이면 서울에 도달하는 한국에서 동일한 접근은 현실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강 이사는 "한국의 지역의료 위기는 물리적 접근성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신뢰의 문제"라고 말했다.
강 이사는 "응급실 하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진료과가 갖춰져야 한다"며 "의료자원의 거점 집중이 불가피한 구조에서는 상급종합병원이 정점이 되는 계층적 의료권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디지털헬스는 계층적 구조의 물리적 범위를 확장하고 주치의의 지속 관리 역량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소멸하는 지역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분만·소아·응급처럼 힘들고 위험하지만 보상은 적은 분야에 그만두지 못하게 막는 방식의 대책은 효과가 없다"며 "이는 신규 인력 유입을 줄이고 남아 있는 의사를 '2류'로 낙인찍는 결과를 만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강 이사는 "디지털헬스는 청진기처럼 의료를 보조하는 도구일 뿐"이라며 "구조적인 문제는 디지털헬스로 해결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