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 의료계 파업과 9월 4일 의정합의 이후 전공의들은 아직 파업의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의대생들의 국시 미응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국회는 각종 의료계를 옥죄는 법안을 잇따라 발의하면서 의료계는 그야말로 혼돈의 연속을 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41대 대한의사협회 후보자 등록이 2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메디게이트뉴스는 의료계 전현직 리더들로부터 차기 의협회장이 투쟁과 협상의 갈림길에서 회원들과 함께 갖춰야 할 덕목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 이를 차기 의협회장 후보자들의 공약과 정책에 반영해보고자 릴레이 기고를 마련했다.
[메디게이트뉴스] 언젠가 어느 의료전문지 기자가 물었다. 지난 십여 년 간 당선된 대한의사협회 회장들이 번번이 회원들의 신뢰를 잃고 불신임에 시달리는지 이유가 무엇이냐고라고 했다.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대개 회장들이 회원보다 자기자신을 우선해서 그렇습니다. 자신보다 회원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과 봉사를 할 수 있는 회장이 필요합니다.’
말해놓고 보면 참 쉬운데 왜 실천이 안 될까. 우선 의협회장이 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대충 이 사람이 앞으로 회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의협회장 선거제도가 직선제로 바뀐 뒤 오랫동안 의료계에서 일하면서 경력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보다는, 주로 한순간의 이슈파이팅이나 강경한 이미지를 어필하는 사람을 선호하고 당선시켜왔다. 물론 이런 점이 직선제만의 단점은 아니다. 간선제의 경우도 선거권을 가진 소수의 ‘그들만의 리그’가 되기 쉽고 또 의협 역사상 불신임으로 퇴진했던 두 명의 회장이 모두 간선제 출신이었으니까.
지난 2000년 의약분업 투쟁 이후 정치권의 의료계 옥죄기가 더욱 심해지면서 회원들은 정부나 국회, 여타 이익단체 등에 대해 강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해왔고 또 그런(정확하게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을 선출해왔다. 그러나 막상 회장으로 뽑아놓고 나면 후보 시절의 강경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고, 임기 내내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끝내기 마련이었다. 회원들의 실망이 클수록 불신임안이 자주 올라왔다.
그렇게 된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은 애시 당초 회원들의 권익보다는 자기 출세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회장으로 선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회장으로서 일하다 보면 종종 이익의 충돌, 즉 자기 개인의 이익(또는 손해)과 회원들의 손익이 충돌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것을 선택할 지는 회장의 가치관에 달려있는데, 이때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관건이 정치다. 어떤 지도자든 마찬가지겠지만, 의협회장이라는 자리는 유혹이 많은 곳이다. 과거 1970~80년대만 해도 의협회장을 거쳐서 국회의원이나 장관으로 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요즘도 의사라는 전문가 단체의 배경이나 추천을 통해 정치권으로 입문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 그 단체장인 회장이라면 그런 단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개인 정치하는 회장은 협회를 망친다
문제는 그러다보면 자신의 경력에 흠이 되지 않기 위해 강하게 나서야 할 때 몸을 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치권은 의사가 사회적 ‘기득권층’이라는 이유로 매번 의사들에게 양보나 불이익을 강권해왔다. 의사들이 더 물러설 데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선을 다 해 싸우다가 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충분히 싸워볼 수 있는 자리에서도 회장의 정치적 득실 판단으로 물러섰다면 회원들에 대한 크나큰 배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의협도 이익단체로서 정치적 세력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들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의사의 권익을 위해 정치적인 역량을 갖추는 정치적 세력화와는 달리, 의협회장이나 임원 등 일부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도모하는 ‘의협의 정치화’는 매우 판이한 이야기다. 한 마디로 의협회장이나 주요 임원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오로지 회원들의 권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의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정치화에 골몰해왔다. 단적인 예로써 지난 4월 제21대 총선에서 의협의 부회장 중 무려 3인이나 특정한 정당에 공천을 신청했다고 한다. 의사회원 개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의협의 회장이나 부회장 등 최고 지도층이라면 적어도 임기 내에는 개인적인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앞서 얘기했듯 개인 정치를 하는 경우 이익의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당에서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이 회원들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십여 년 간 틈 날 때마다 의협회장 등 주요 지도자들은 임기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국회의원 등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해왔다. 최소한 임기 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회원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일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조항을 의협 정관에 삽입하면 좋겠지만 안 되면 회장 출마자들이 후보 등록 시 공식 선언을 하고 만약 어길 경우 거액을 배상하도록 계약서를 작성하는 건 어떨까.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회장은 개인 이익보다는 전체 의료계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자율적으로 안 된다면 제도적으로라도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유명무실한 이사회를 강화하고 회장이나 상임이사회의 권한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임원들 역시 회장의 측근이나 생계형으로 임명하는 것보다는 경험과 능력 위주로 선발할 수 있도록 추천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하는 것도 좋다. 대의원회 역시 국회를 벤치마킹해 수시로 분과위원회를 개최해 집행부가 잘 하는 것은 돕지만 못하는 것은 바로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는 자기 이익이나 출세보다는 회원들에게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회장을 선출해야 한다. 그것을 회장 개인에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충분한 사전 검증과 함께 제도적으로도 갖춰야 한다. 그래서 회장이 되는 순간 다른 데 한눈 팔 겨를이 없이 오로지 회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성공한 회장으로 남게 되는 것까지는 장담을 못해도 최소한 불신임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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