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아기가 출생 후 뇌성마비 진단을 받으며 산부인과 의사 2명(사건 당시 서울의대 교수·전공의)이 불구속 기소된 사건과 관련해, 민사 재판부는 의료진에게 경미한 과실이 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분만 과정에서 의료진이 태아의 상태를 충분히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당 민사 재판 결과와 재판에 제출된 감정의의 감정 결과 등은 최근 검찰이 A씨와 B씨를 불구속 기소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경찰은 해당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었다.
9일 메디게이트뉴스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지난 5월 14일 법원은 서울의대 산부인과 교수 A씨와 사건 당시 전공의였던 B씨 등이 산모 측에 약 6억5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산모 C씨는 2018년 12월 22일 오전 5시 무렵 진통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고, 오후 3시 41분경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 직후 아기는 주산기 가사 상태(저산소증·질식 등으로 심폐 기능이 위급한 상태)에 있었으며, 이후 저산소성 허혈성 뇌병증 소견을 보였다. 아기는 생후 5년 뒤 신체감정에서 뇌성마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고 측(산모 측)은 이와 관련해 의료진이 분만 과정에서 ▲옥시토신 투여 및 중단과 무통주사 투여상의 과실 ▲분만 지연 등 조치상의 과실 ▲설명의무 위반 ▲태아안녕 감시 해태나 평가 잘못 및 보고 의무 위반 등이 있었다며 약 24억원의 배상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옥시토신 및 무통주사 투여와 관련해 “옥시토신 투여에 의한 분만 촉진이나 무통주사의 일시 투여 등은 피고들(의료진)의 합리적 재량 범위를 벗어나 시행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측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설명의무 위반 부분에 대해서도 “옥시토신을 사용하면서 아무런 동의서를 받지 않았고, 사용 이유나 투여에 따른 후유증, 부작용 가능성 등에 대해 설명을 했다고 볼 만한 증거는 없다”면서도 “저산소성 허혈성 뇌병증이 옥시토신 사용으로 인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태아, 출산 직후 저산소성 허혈성 뇌병증 소견…옥시토신·무통주사 투여는 재량 범위
다만 재판부는 감정의의 의견 등을 근거로, 의료진이 분만 과정에서 태아 심박동수 이상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적절한 조치를 취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했다.
실제 감정의는 “14시 15분부터 반복적인 태아심장박동수 감소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태아곤란증을 의심하기 시작해야 한다. 14시 35분부터는 응급제왕절개를 염두에 두고 세심하게 관찰해야 할 상황이었다” “14시 30분 이후의 상황은 미국산부인과학회의 3단계 태아심장박동 해석체계상 카테고리 3으로 볼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심음 패턴들이 나타났는데, 확실히 카테고리 3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에 준하는 패턴으로 여겨진다” 등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피고 측은 태아의 심박동수를 지속적으로 확인했고 정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취지로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최소 14시 30분경부터 분만이 이뤄진 15시 41분경까지 약 1시간 동안 태아의 안녕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됐다며 피고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들은 실제 태아심장박동수 양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거나, 주의 깊게 관찰했다면 태아의 안녕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임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의심하지 않아 평가를 잘못한 과실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했다.
이어 “미국산부인과학회의 2010년 권고안에 따른 자궁 내 소생술 등을 시행한 뒤에도 호전이 없었다면 응급분만을 고려해야 했다”며 “그런데 피고들은 태아 심박동수 양상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해태하거나 평가를 잘못해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한 과실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재판부는 원고 측이 분만 과정에서 다른 분만 건으로 자리를 비우기도 했던 전문의 A씨에게 전공의 B씨가 태아 심박동수 등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과실이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선 “B가 보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 잘못된 평가나 조치를 했다고 해서 주의의무가 경감된다고 볼 수는 없다. B를 지휘·감독할 책임이 있는 피고 A가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주의의무 위반이 없다고 볼 수도 없다. 다만 피고들 사이의 보고의무 위반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환자인 원고 측에 대한 과실이라고 볼 건 아니다”라고 했다.
분만 중 저산소증과 뇌성마비 인과관계 추정 가능…분만 자체 위험성 등 고려해 배상액 제한
재판부는 원고 D(환자)의 뇌성마비와 분만 중 저산소증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산기 가사가 뇌성마비와 연관됐다고 보려면 출생 후 신생아 뇌병증의 소견이 있어야 하는데 원고 D는 출생 직후 신생아 뇌병증 소견을 보였다”며 “전반적인 저산소성 허혈성 뇌손상 이후 발병하는 뇌성마비의 형태는 주로 강직성 사지마비인데, D의 경우 이 유형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어 “2003년 미국산부인과학회에서 제시한 뇌성마비 발생의 4가지 조건도 모두 충족한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는 “완벽한 평가 시행이 불가능해 원고 D의 상태가 4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주장했고, 피고 측 역시 “출생 후 저산소성 뇌손상은 선천적 결함이나 유전적 요인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반박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재판부는 ▲태아 심박동 모니터링의 불확실성 ▲분만 과정 자체의 위험성 ▲현대 의학지식의 불완전성 등을 이유로, 의료진의 배상 책임을 전체 재산상 손해액 20억원의 30%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병원과 의료진은 약 6억원과 위자료 5000만원을 포함해 총 6억5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분만 제2기의 비정상 태아 심장박동수 유형의 중요성은 아직 불명확해, 태아심장박동수 양상만으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그에 따른 조치를 결정하기도 쉽지 않다”며 “주의 깊은 관찰을 했더라도 조치가 달라지지 않았을 여지가 있고, 분만 과정에서 전자태아감시장치를 사용했으므로 통상적인 감시는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이런 사정을 종합하면 이 사건 과실의 내용과 정도는 경미하고, 주의의무를 현저히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분만 제2기 태아 심박동수 양상의 불명확성에 더해, 이 사건 분만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다양성 태아심박동수 증가는 거의 모든 진통 중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중 저산소증을 시사하는 특정 소견을 정의하기는 어렵다”며 “따라서 이 사건 분만 관리에는 그 특성과 한계에 따른 위험이 적지 않았다. 원고 D의 장애는 이러한 위험이 발현된 측면도 있으므로 일정 부분 원고들이 감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원고 D가 출생 후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점은 과실의 결과가 중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면서도 “현대 의학지식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다른 원인, 즉 산모나 태아 측 요인을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결국 개연성의 증명만으로 과실과 인과관계의 추정을 인정해야 하므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원고들도 분담하는 것이 손해 분담의 공평이라는 손해배상제도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