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대한민국 필수의료의 붕괴는 더 이상 경고가 아닌 실재하는 재난이다. 분만실이 사라지고 소아과 오픈런이 일상이 된 비극적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배상보험료 지원’은 벼랑 끝 의료진이 법정이 아닌 진료실을 지키게 할 최소한의 마중물이자 마지막 비상구였다. 하지만 최근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장의 발언은 이 절박한 비상구마저 폐쇄하려 하고 있다.
필수의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자기책임주의’와 ‘조건부 면책’을 운운하는 이들의 논리 뒤에는 현장의 생존보다 자신들의 영향력 유지를 우선시하는 지독한 ‘기관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1. 원칙론에 매몰된 국회입법조사처, ‘자기책임’이라는 이름의 가혹한 방관
국회입법조사처는 비용 발생 주체가 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는 ‘자기책임 원칙’을 내세워 정부 지원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지원이 책임보험 의무화 정책에 역행하며 형평성 논란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관련기사=국회입법조사처 "의사 정보 독점, 환자가 의사 과실 입증 못해"]
하지만 묻고 싶다. 24시간 분만실을 지키며 불가항력적 사고의 공포 속에 메스를 드는 의사들에게 국가가 통제하는 저수가 체계 안에서 모든 리스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공정인가?
이미 현대해상화재보험과 계약이 완료돼 정책이 실행 궤도에 올랐음에도 입법조사처는 제도 간 정합성을 이유로 이를 무산시키려 한다. 이는 필수의료의 위험을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의료사고 처리 특례’의 대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며, 의사들에게 고위험 진료를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조건부 면책’, 또 다른 법적 굴레일 뿐이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형사 절차 면제의 전제로 '민사 배상에 대한 정부 담보'와 함께 의료기관의 '사고 이유 설명 의무'를 제시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의료진에게 또 다른 법적 굴레를 씌우는 기만적인 행위다. [관련기사=의료분쟁중재원 "의료사고, 형사 절차 면제 검토해야"]
사고의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 성급한 설명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향후 민사 소송에서 의료진에게 불리한 자백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결국 중재원은 형사 처벌 면제라는 미끼를 던져 자신들을 통한 조정 절차를 강제하고, 그 과정에서 기관의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셈이다.
필수 의료진이 원하는 것은 중재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조건부 면죄부'가 아니라, 고도의 전문적 판단이 존중받는 실효적인 형사적 보호망이다.
3. 이미 가동된 안전망을 흔드는 ‘탁상공론’의 저의를 묻는다
정부는 이미 2025년 50억여 원의 예산을 집행하고, 2026년에는 이를 82억여 원으로 증액 편성하면서 필수의료 살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와 8개 필수과 전공의들이 이미 이 안전망에 몸을 싣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입법조사처가 예산 전환을 운운하며 정책을 흔드는 것은 필수의료의 긴박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다.
입법조사처와 중재원에게 필수의료는 정책의 본질인가, 아니면 보고서를 채우고 기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인가?
입법조사처는 예산을 보상 재원으로 전환하라는 등 제도 간 정합성만을 따지고 있으며, 중재원은 형사 면제를 미끼로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려 한다. 두 기관 모두 필수의료가 처한 '형사 처벌의 공포'와 '배상의 파산적 위협'이 인프라를 얼마나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결론: 현장을 모르는 정책은 독(毒)이다
필수의료 현장의 의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마중물'로서의 안정적인 보험료 지원과 고도의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의료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형사 처벌 면제다. 원칙론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입법조사처와 중재원은 더 이상 원칙론과 조건부 면책이라는 수사로 현장의 의사들을 기만하지 마라.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계약 완료된 보험 지원 사업을 공고히 하고, 이를 마중물 삼아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을 조속히 완수하는 국가적 결단이다.
기관의 권위와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논쟁은 이제 멈춰라.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필수의료진이 법정이 아닌 분만실에서 환자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진정성 있는 국가적 결단이다. 특히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필수의료의 가치를 훼손하는 그 어떤 시도에도 당당히 맞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