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 당뇨, 단순 감기에도 대형병원으로 직행하는 환자들이 증가하면서 의료전달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환자들은 동네 의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질환마저도 대형병원을 이용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고, 우리나라 건강보험체계는 환자들이 큰 무리 없이 3차병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대폭 낮췄다.
3차병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1차 의원의 진료의뢰서가 필요한데 환자들은 손쉽게 의뢰서를 받을 수 있고, 단 한번만 발급 받으면 언제든 큰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3차병원을 이용하는 환자와 동네의원을 이용하는 환자의 본인부담 차이가 질환 별로 1.5~3배에 불과하다보니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큰 병원 = 전문적이다?
실제 환자들은 대형병원이 동네의원보다 전문적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기자가 서울의 모 대학병원 내과를 찾은 여성 A씨에게 어떤 진료를 받기 위해 내원했는지 묻자 "관절염 때문에 왔다"고 답했다.
A씨는 "아무래도 동네의원보다는 큰병원이 더 전문적이잖아요"라면서 "일단 대학병원이고 하니까 믿음이 있죠"라고 말했다.
동네의원에 가지 않고 대학병원에 온 이유를 물어보니 "내 생각에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면서 "동네의원도 한 번 가봤는데 금방 낫지 않았고, 이왕 병원 다닐거면 큰병원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당뇨 때문에 대학병원에 내원한 남자환자 B씨는 충남 대천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B씨는 "당뇨 때문에 병원에 오기 시작했고, 3개월에 한 번 가량 와서 진찰받고 약도 3개월 치를 타가고 있다"면서 주기적으로 대학병원에 온다고 설명했다.
대천에 있는 병의원을 가지 않은 이유를 묻자 "시골에 있는 병원보다는 큰병원이 훨씬 좋다"면서 "더 전문적으로 보이고 일단 큰병원이니까 신뢰가 간다"고 대답했다.
진료의뢰서 발급에 익숙한 동네의원
이처럼 환자들의 대형병원에 대한 무한 신뢰와 낮은 진료비용, 손쉬운 접근성 등은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어렵게 하고 있다.
평소 환자들로부터 진료의뢰서 발급 요청을 많이 받고 있다는 한 내과 개원의 L원장은 "진료의뢰서를 발급받는 10~30%의 환자들은 대학병원에 갈 필요가 없는데 요구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발급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L원장은 "불필요한 의뢰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일단 환자들의 요구가 크고, 간혹 특정질환을 발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그는 "3차병원에 갈지 여부를 전문 의료진이 하는 게 아니라 비전문가나 주변 지인의 조언을 통해 이뤄지는 특이성 또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잘못된 정책이 빚은 의료전달체계
의료계에서는 지금처럼 환자들이 3차병원으로 직행하는 것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하고, 이를 개선하지 않다보니 고착화됐다고 지적했다.
L원장은 "과거 1, 2, 3차 의료기관의 단계적 의뢰 및 재회송 시스템을 이용했을 때와 달리 1998년 진료권을 규제로 인식하는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의뢰시스템 자체의 장벽을 철폐하고, 1차에서 바로 3차로 의뢰가 가능해졌다"면서 "이때부터 대형병원으로 환자 집중현상이 가속화됐다"고 밝혔다.
장벽 자체가 없어진 현실에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L원장은 "애초에 진료의뢰시스템을 규제라고 엉터리로 판단한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더 심각하다"면서 "질서를 규제로 본 결과, 지금처럼 무질서한 상황이 발생하게 됐고, 이것이 한국 의료의 현실"이라고 질타했다.
이에 L원장은 "불필요한 의뢰를 줄이기 위해서는 심평원이 개입해 의뢰서를 심사 판단하거나, 아니면 국민들이 직접 심평원과 접촉해 상급병원 이용 허가서를 발급 받도록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체념한 듯 말했다.
정부가 민간 의료기관에 진료의뢰 시스템을 맡기고 방관자보다 못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애둘러 비판한 것이다.
L원장은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을 찾거나 최단시간 안에 치료가 되고, 경제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인데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게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대형병원 외래진료 자제 필요
따라서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형병원이 외래진료를 자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많지만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증가하는 외래환자의 진료공간을 위해 오는 2018년 완공을 목표로 '첨단외래센터'를 짓고 있으며, 대학병원들이 병동을 리모델링하거나 증축하고 방식으로 외래 확대 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L원장은 "상급의료기관은 중증환자 진료에 전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경증환자들에게 수 백일의 처방전을 남발하거나 미리 예약을 받고 환자들에게 의뢰서를 받아오라고 안내해주고 있다"면서 "이런 행태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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