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누군가에게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우리 사는 모습과 같습니다. 진료실에서 펼쳐지는 우리 삶의 풍경을, 환자들과 저의 마음속에 오롯이 남은 소중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나 봅니다."
서울을지병원 김정환(42·가정의학과) 교수가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들의 사연과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들의 풍경을 '사람아, 아프지 마라(출판사 행성B 잎새)' 산문집으로 펴냈다.
병에 대해, 치료법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는 그야말로 산문집이다.
김정환 교수는 16일 "환자의 이야기라기보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병에 대한 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부부, 자녀 등 가족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진료실 이야기 1.
할머니를 따라 진료실에 들어온 참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는 진료실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그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는 주눅이 든 것처럼 보였다.
이를 지켜보는 의사는 할머니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할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할머니에게 직접 "앞으로 1년간 더 약을 먹고 운동도 계속해야 한다"고 조곤조곤 말씀 드렸더니 고개를 숙이신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의사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귀가 거의 안 들립니다."
진료실 이야기 2.
넉살 좋으신 영감님의 말씀이 끝없어 이어지면서 20분쯤 시간이 지났고, 이미 외래를 마치는 시각도 지났기에 말씀을 드렸다.
"다음에 또 이야기 듣겠습니다. 오늘은 혈압약을 좀 받아 가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그랬더니 어르신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물어보셨다.
"선생은 집에 환자가 있소? 말을 할 수 없는 환자랑 단둘이 5년쯤 살아본 적이 있는가 말이오?"
중풍으로 집에 누워 있는지 벌써 오육년이 지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할아버지.
의사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지 못하고 끊어버린 것이 미안했다.
진료실 이야기 3.
진료실에 오면 본인의 병세 이야기보다 의사의 손을 잡고 "예쁘다. 예쁘다."는 말만 반복하다 가는 할머니 환자.
할머니의 막내 아들은 재작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그는 의사와 나이가 같다.
의사는 그 할머니께는 그 어떤 치료나 말보다 10분쯤 손을 빌려드리는 것이 제일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진료실 이야기 4.
검진 결과 상담을 위해 1년 만에 병원을 찾은 50대 초반 남성.
'말레이시아 지사 발령. 조만간 출국 예정'
의사는 검진 결과를 훑어보다가 작년에 써 두었던 이 메모를 보고 그에게 물었다.
"말레이시아 생활은 어떠세요?"
그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고, 장난기가 발동한 의사는 "제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도 역시 웃으며 받아쳤다.
"제 기억에는 선생님께서 말레이시아 가는 걸 차트에 기록해 두겠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요. 제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요."
앗! 의사는 차트에 새로운 메모를 남겼다.
'기억력 엄청 좋으심.'
김정환 교수는 "진료실에 들어오는 환자의 질병보다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게 뭘까?
그랬더니 그는 자신의 삶의 멘토였던 고려의대 가정의학교실 홍명호 전 교수가 학부 시절 강의 시간에 했던 말을 전했다.
"너네는 병에 대해 외우는 걸 공부하고 생각하는데 그것만으로 환자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말 환자를 볼 때는 병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고 사람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은사를 따라 가정의학과를 선택했고, 진료할 때 그 사람의 병도 병이지만 가정형편, 가족관계, 직업 등의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10분, 20분 환자 이야기를 듣다보면 진료실에는 때론 눈물이, 때론 웃음이, 때론 위로가 번지고, 마음이 열리면 어떻게 치료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김 교수는 이렇게 환자의 마음을 열기 위해 초진환자의 경우 15~20분가량 할애한다고 했다.
그는 "고지혈증 환자를 단순히 이런, 저런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반복적인 처방밖에 할 게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좀 더 오래 진료하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의사가 이런 식의 진료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는 "하루에 보는 환자가 그리 많지 않고, 대학병원 특성상 가정의학과에 환자가 몰릴 일이 없다보니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의사라면 누구나 환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개원의라면 저수가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사람아, 아프지 마라'는 책 제목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책의 제목은 출판사가 팬클럽 투표에 붙여 정했다고 한다"면서 "아마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아프더라도 마음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정환 교수가 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달 26일 오후 7시 30분부터 서울 조계사 경내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리는 '꽃보다 의사, 김정환 북콘서트'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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