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노후 생활을 위해 자산 재설계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어떻게 설계할지 막연하다면 기본 원칙부터 알아두자. 기본에 충실해야 안정성과 수익성 2가지를 모두 챙길 수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시를 쉽게 쓰기로 유명했다.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전혀 모르는 동네 노인에게 읽어주고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이 있으면 알아들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발표한 시는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노구능해(老嫗能解)라는 말이 생겼다. ‘할머니가 능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의 쉬운 시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목동이나 말몰이꾼 입에까지 오르내렸다.
누구나 이해하게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얘기를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난해한 전문 용어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권위와 지위가 높아질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성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다. 어록처럼 핵심을 짧고 쉽게 말해야 호소력이 있는 법이다. 일일이 사안을 설명하는 것보다 짧은 속담이나 경구 한마디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 다시 말해 진정한 내공은 간단명료함에서 나온다.
초등학생이 이해하는 포트폴리오
나이가 들수록 뭘 하든 간단한 게 바람직하다. 만약 당신이 노후 포트폴리오(자산 목록)를 짠다면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단하게 하는 게 좋다. 연필로 5분 안에 그리지 못하는 포트폴리오는 처음부터 짜지도 마라. 계획의 실행력은 바로 복잡하지 않은 데서 나온다. 구체성을 담보한다면 지속적인 실행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리저리 얽혀 복잡하면 몸은 움직이지 않고 정신만 산만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누구나 중·고등학생 시절 방학 때 계획만 요란했지 실천은 작심삼일(作心三日)에 그친 경험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큰 실패 이유는 계획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짰기 때문이다. 가령 공부 욕심에 30분이나 1시간 단위로 빽빽하게 시간을 짜고 학습량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최대한 늘린다. 그러나 공부는 생각만큼 뜻대로 잘 되지 않고 학습 진도도 지지부진하다. 이제는 당초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것을 두고 자신을 끊임없이 책망한다. 당초 계획을 현실에 맞게 신속히 수정하기보다는 모든 계획을 헝클어뜨리는 자기 파괴적 행동을 보인다. 완벽주의자 성격이 강할수록 이런 행동을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애초부터 계획을 짜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을 여유 있게 짰다면 상황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으로 돌아가자. 노후에는 부동산 보유 개수가 많으면 관리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사는 집을 빼고 1채, 많아야 2채를 넘지 않는 게 좋다. 여윳돈이 생기면 부동산 가지 수를 늘리기보다 그 돈으로 차라리 입지가 좋은 우량 부동산으로 갈아타는 게 낫다. 양보다 질로 승부를 거는 것이다. 수익형 부동산의 위치도 사는 곳에서 버스로 1시간 이내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좋다. 수익형 부동산은 마치 애완용 개 키우듯 관심을 두고 잘 살펴야 한다.
예기치 않은 각종 위험은 나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날 때 자주 발생한다. 금융 상품도 남의 말만 듣고 투자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잘 모르는 데 투자하는 게 투기다. 미국의 가치 투자자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정보 기술주 투자 붐이 불었을 때도 굴뚝주(전통 산업 주식)를 편식하기로 유명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보 기술 산업의 구조 자체가 굴뚝 산업보다 이해하기 힘들고, 미래를 확신하지 못해서 아닐까 싶다.
나이 들어서 투자할 때는 내가 상품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나 옆집 할머니가 상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자해서는 안 된다. 복잡하면 꼬이기 마련이다. 파생 상품도 간단한 구조면 모를까, 복잡다단하면 수익이 높더라도 투자하지 않는 게 좋다. 투자하는 금융 상품 가짓수도 스스로 관리 가능한 수준까지만 늘려라. 요컨대 나이 들어선 삶도, 사랑도, 투자도 심플(Simple)•이지(Easy)가 최고다.
떨어지는 인지 능력, 무시하지 마라
“아버지가 말년에 매수한 주식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아버지가 조금만 젊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켄 피셔(Ken Fisher)는 아버지 필립 피셔(Philip Fisher)가 ‘성장주 투자의 대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노년에 투자 실력이 형편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누었지만 주식 매매 타이밍을 번번이 놓쳤고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판단력이 흐렸다. 노년에 내린 의사 결정은 재산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게 했다. 그는 “늙은 나이에 뛰어난 투자자는 보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어떤 식으로든 투자 결정을 하지 마라”고 조언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노화가 진행되면서 인지 능력도 젊었을 때보다는 떨어진다는 뜻이다.
인지 능력에는 지식, 사고력, 문제 해결력, 비판력, 창의력 등 다양한 정신 능력이 포함된다. 물론 인생을 관조하는 지혜나 통찰력에서는 젊은이보다 앞설 것이다. 하지만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고집이 세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력도 떨어진다. 그뿐 아니라 상황 판단력이나 순발력은 젊었을 때보다 못하다. 더욱이 70세 이후에는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지 마라. 멀쩡한 사람도 갑자기 인지 장애의 일종인 치매성 질환을 앓을 수도 있다. 인지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변화무쌍한 금융 시장에서 사소한 실수만으로도 돈을 날릴 위험성이 크다. 자산 운용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요즘 주식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신 유행과 경향을 신속하게 포착하는 트렌드 워처(Trend Watcher)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글 같은 머니 게임장에서 고령자들이 높은 투자 수익을 얻기는 쉽지 않다. 다 잃지 않으려면 나이 들어서는 무리한 투자보다 평균 수익률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잘해봐야 남들 버는 만큼만 번다는 보수적인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동산에서도 시시각각으로 시세가 변하는 재건축이나 분양권, 손바뀜이 잦은 개발 예정지 토지 거래는 피하는 것이 좋다. 오히려 개발이 끝나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기존 도시의 부동산, 투기적 수요보다 실수요가 두터운 부동산, 현금 흐름이 충실한 부동산을 사는 게 좋다.
가지치기의 지혜
“나이 들면서 좋았던 것도 있었겠지요?”
“몸이 말을 안 듣는데, 뭐 좋은 일이 있겠나?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돼. 부질없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되더군.”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는 느린 여행을 하는 한 노인의 힐링 에세이다. 73세의 앨빈 스트레이트(리처드 판스워스 분)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앨빈에게는 승용차와 운전면허증이 없다. 궁리 끝에 낡은 잔디깎는 기계를 개조한 캠핑용 트랙터를 몰고 여행을 떠난다. 여정 500㎞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그는 길에서 만난 사이클 동호회 젊은이들과 야영을 하면서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앨빈이 인생을 묻는 젊은이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인상적이다. 그의 메시지는 ‘나이가 드니 대수롭지 않은 일에 연연하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한 젊은이는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는 앨빈의 말을 듣고는 “멋진데요”라고 감탄한다.
부질없는 일에 얽매이지 않으려면 인생의 ‘가지치기’가 필요할 것 같다. 가지치기는 곧고 마디가 없는 양질의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다. 나이 들어 인생 설계든, 자산 설계든 사안의 경중을 가리는 작업이 무엇보다 절실해진다. 진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하고 중요한 것은 취하고 사소한 것은 버리는 것이다. 원하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대로변 상가 건물 매입을 생각하는 김형국(가명, 56세) 씨를 예로 들어보자. 김 씨가 건물을 살펴보니 지상 3층짜리 건물은 대지가 넓고 임대 수익도 안정적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고 외관도 낡았다. 단점 없는 건물은 없는 법이다. 김 씨가 나이 들어 임대 수익을 얻기 위해 건물을 사는 것이라면 임대 수익 목표에 가중치를 두고, 나머지는 잘라야 한다. 외관은 임대료를 모아 나중에 수리하면 된다. 또 3층 정도는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고, 나중에 증축할 때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도 있다. 임대 수익은 몸통이자 본질이고 외관과 엘리베이터는 곁가지이고 부차적인 것이다. 선택 과정에서 초점을 잡지 않고서는 고민만 커질 뿐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현명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곁가지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핵심에만 집중해야 한다. 곁가지를 버리면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고 평온해진다. 과감한 결단을 위해서 때로는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도 슬기로운 방법이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되묻자. “다 버리더라도 꼭 가져가야 할 마지막 하나가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팁. 몸통과 곁가지는 구분하려면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나무를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몸통과 곁가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확실히 보인다. 거리두기는 좀 더 냉철한 시각을 갖는 데 중요하다.
꼬이지 않으려면 완충을 둬라
3년 전 은퇴해 지금은 경기도 안산시에 살고 있는 박진경(가명, 62세) 씨. 요즘 그는 아내와 자주 신경전을 벌인다. 아내가 서울 외손자를 봐주기 위해 집을 자주 비우면서 생긴 일이다. 아내는 맞벌이 부부인 큰딸이 육아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아예 돌보미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혼자 적적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시로 서울까지 오가는 아내의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은 것도 마음이 쓰인다.
문제는 역시 커리어 우먼인 서울 막내딸도 내년에 결혼할 예정인데, 은근히 손주 돌보미를 기대하는 눈치다. 박 씨는 “자식이 결혼해서도 애프터서비스를 해줘야 하는 한국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거주지를 옮긴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는 안산 집을 팔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을 요구한다. 노후 재설계가 당초 예상치 않은 손주 돌봄 문제로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박 씨처럼 노후 재설계가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좋다. 남자들 대부분은 계획을 세우면 앞뒤 재지 않고 불나방처럼 덤벼든다. 목표 달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자긍심을 확인하려는 남자만의 특성 때문이다.
노후 재설계는 돌발 변수를 고려해 유연하게 짜는 게 좋다. 당신이 구상하는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고 변경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완충(Buffering)을 두는 것이다. 그 완충의 한 방법은 당초 계획보다 시기를 한 템포 늦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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