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말장난, 거짓말로 학생들과 의사들을 우롱하는 정부, 이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이틀 전 정부를 비난하고 의료계를 걱정하는 글을 써서 언론사로 보내려는 순간 속보가 떴다.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와 복지부장관, 교육부 장관이 ‘26년도 의대 정원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논의할 테니 의사들이 협상 테이블로 나와라, 26년도 정원을 유연하게 협의할 수 있을 것’ 이라는 발표를 듣고 정부가 ‘항복했다’ 라는 놀랍고 반가운 생각에 이미 썼던 글을 몽땅 지웠다. 그런데 기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이건 또 뭐지? 라는 의심이 들며 '역시 이번에도 정부의 말장난, 거짓말에 의사들이 또 속겠구나'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글을 다시 고쳐 쓰고 있다.
‘일단 협상 테이블에 나와라, 제로 베이스 논의’ 라고 했지 2000명 증원을 취소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협의하겠다’ 도 아니고 협의를 ‘할 수 있다’라는 표현도 매우 거슬린다. 정치인의 말에서 ‘하겠다’와 ‘할 수 있다’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게다가 의사 집단 전체를 악마화 하며 ‘처단’ 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모욕한 것에 대한 진정한 사과도 없다. 그저 늘상 마지 못해 하는 ‘유감을 표한다, 위로 한다’ 라는 말 뿐이다. 이와중에 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26학년도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은 법으로 확정된 것이므로 바꿀 수 없다’ 라고 발표해서 혼란과 불신을 더 키웠다.
발표 타이밍도 절묘하다. 제로베이스에서 26년도 의대정원 재검토를 발표하면서 그동안 의사들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추진하던 ‘필수의료 패키지 개악’과 ‘실손 보험 개혁안’을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26년도 입학정원을 한달 안에 결정해야 하는 지금 이제껏 정부가 호주머니 쌈짓돈처럼 정부 곳간에서 마구 꺼내 쓰던 재난관리기금, 예비비 등 정부예산과 건보 재정도 이제 바닥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민심도 등을 돌리고 있고 정치권도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정부가 다급해진 것이다. 이에 새 의협회장 취임에 맞춰 정부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불순한 의도가 보인다.
지금 불안정한 정치상황에서 본인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는 장, 차관들과 의사대표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섣부른 대화로는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윤석열의 부역자 노릇에만 충실했던 장, 차관들에게 대화를 시도했다는 알리바이만 줄 것이고 의사들은 얻는 것도 없이 오물만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정부는 26학년도 정원을 다시 협의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26학년도 정원에 대한 확답을 공식적으로 공표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이제 김택우 회장이 선출돼 의협을 이끌게 된다. 원래도 수많은 난제들, 이해관계가 얽히고 상충하는 문제들의 합의점을 찾아야 하며, 일방적인 주장만 펴는 정부와 협상도 해야 하는 의협의 수장은 독배를 마시는 자리이다. 특히 지금은 의대정원 증원을 반드시 원상 복구 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코 앞에 두고 있다. 26년도 의대 신입생 5000명 이상 선발은 반드시 막아야 하며 이것이 신임 회장의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서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상상만도 두렵지만 최악의 경우 대한민국의 모든 진료행위를 일시적으로 완전히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26년도 증원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극한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이제 또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순진하게도 여러 차례 속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정치, 사회 불안정성이 최고 치에 이른, 거의 무정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상식과 상호 신뢰는 진작에 사라졌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침에 눈 뜨기 겁난다는 국민도 많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도 모호하다. 그래서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대부분 고위 공직자들은 지금 교도소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대단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이렇게 기괴한 정치 지형에서 예민한 주제인 의대 증원, 의료 개혁에 관한 장, 차관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어찌 보면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를 덮으려는, 그래서 책임과 처벌을 면해보려는 단말마(斷末魔)의 절규 쯤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의료 붕괴가 시작된 지 벌써 일년이 넘어가고 있고, 윤석렬의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무정부상태가 벌써 한달을 넘기고 있다. 더 고약한 것은 이런 국가적 재앙이 단시일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경제와 민생파탄이 극심하기는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래도 어찌되었 건 나라가 굴러가는 걸 보면 참 대단한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內亂(& 外亂)을 막아낸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을 보면 언젠가는 끝날 이 암흑기의 끝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이 보인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친 정책’에 반대하며 의료붕괴 상황을 1년씩이나 버티게 해준 가장 큰 원동력도 역시 젊은이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불리한 전쟁터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한 최전방 전위부대(前衛部隊)가 학생들과 전공의들이다. 향후 언젠가 대한민국이 정상화돼 고질적인 의료 문제들이 개선되고 의료가 한층 더 발전한다면 그 모든 것은 지금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젊은 의사들, 예비의사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이라도 이들이 헛되이 시간을 낭비되지 않고 좀더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선배 의사들이 앞장서서 도와야 한다.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사직 전공의들도 피해를 입고 있으나 일단 많은 전공의들은 각자 도생하며 여러 의료 기관들에서 의업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기도 한다. 반면에 휴학생들은 1년간의 휴학만도 심각한데 25학년도에 4500명에 가까운 신입생 모집이 완료되면 지금의 휴학생들이 연이어 또 다시 휴학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25학년도 신입생들도 열악한 교육현장을 접하면 많은 수가 역시 휴학을 선택할 것으로 짐작된다. 휴학하지 않은 극소수 학생들도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지만 지금 휴학 중인 학생들 18721명과 25학년도 신입생 4500명까지 모두 25년도에도 휴학을 한다면 2만명이 넘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는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지구 상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해괴한 불상사는 없다. 단 한 명의 ‘미친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장, 차관, 고위 공무원들은‘자기들 코가 석자’ 라 이런 피해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래서 이 많은 휴학생들에 대한 대책을 가장 깊이 고민하고 마련하는 것이 의협 새 집행부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보인다.
의협 뿐 아니라 여러 의사 단체, 학회, 동창회도 선배의 입장에서 학생들 지원에 앞장서야 한다. 학생들이 귀한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많은 학생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선진국 의대 졸업생들이 간혹 가지는 갭이어(gap year)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대부분 학생들이 평생 공부만 해왔고 특히 최근 수년간은 입시 준비에 몰두해 왔던 학생들이 모처럼 다양한 활동과 국내, 국외 봉사활동 등을 통해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돼야 한다. 언제까지 일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단 하루라도 이들이 시간을 보람되게 보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문학, 의료정책, 의료법, 의사들의 수필집, 환자 수기와 사례 집 등 다양한 서적들을 추천, 제공해줘야 한다. 학생들을 위한 독서클럽, 공부모임, 강의시리즈, 토론프로그램, AI 교육, 논문 작성 교육, 학생들을 위한 섬머캠프 같은 행사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각 학회가 시행하는 학술대회, 연수강좌에 학생들의 방청을 독려하는 것도 좋다.
나아가서 다양한 기관들, 예를 들면 국회의원 집무실, 언론사, 연구소, 바이오,제약회사의 견학 또는 참여, 해외 학회 및 의료기관의 방문기회를 가지는 것도 좋다. 의협이 휴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디렉터 역할을 하면 좋을 것이다. 선배의사들, 은퇴의사들을 활용할 수도 있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들이 성공한다면 학생들이 인문학적 소양과 배경지식이 풍부한 훌륭한 임상의사 또는 의과학자가 될 수 있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축적한 학생들은 기성 의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신 개념의 의사들,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료 혁명’이라는, 선배 의사들이 이루지 못한 놀라운 과업을 이루는 차세대 의사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운명처럼 맞이한 무시무시한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 만을 떨리는 가슴을 안고 기다리고 있다. 각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 국민은 학습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아마도 지금의 이 해괴한 의료 붕괴 상황을 거치며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결국 이 재앙에도 끝이 있을 것이고 그 후 우리는 더 좋은 의료제도, 그리고 좀 더 단단하고 성숙된 자유민주국가로 거듭날 것이다. 이 모든 것도 역사의 긴 흐름으로 보면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해 나가는 ‘진통’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이런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 평상시 같으면 불가능했을 의료 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새해 벽두에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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