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보장 의무 충돌에 신고자 노출, 신고방법 교육 부재"…'정인이 사건' 의사 탓 아닌 시스템 개선을
"아동학대 의무신고 법만 있고 시행 기전은 유명무실...안전한 신고·피해자 발굴 적극 참여 환경 조성해야"
[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16개월 영아가 양부모에게 학대받아 숨진 일명 '정인이 사건'이 국민적 충격을 주면서 의료인의 아동학대 의무신고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이 입 안의 상처를 구내염으로 잘못 진단했을 뿐만 아니라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공분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지난 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소아과의원에서 정인이에게 허위진단서를 내린 의사의 의사면허를 박탈해달라’는 취지의 청원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인은 "소아과의원 의사가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전문의로서 찢어진 상처와 구내염도 구분하지 못해 의사로서의 능력이 의심된다"며 "가해자가 유리하도록 허위 진단서를 내려 정인이를 구하기 위한 신고자들의 노력을 무력화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청원은 논란이 일자 6일 삭제됐지만 삭제 전까지 수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며 사회적 공분을 여실히 반영했다.
현장 의사들은 오히려 진땀…신고했다고 협박사례까지
그러나 한 아이의 희생에서 초래된 국민적 공분과 별개로 우리는 과연 제때 신고하지 못한 의사 개인을 비난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의 의견은 좀 달랐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출신인 김연희 변호사(법무법인 의성)는 자신이 의사 시절 응급실에 방문했던 환자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이의 몸엔 멍자국이 있었지만 아이 부모는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답변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였다. 충분히 넘어지면서도 생길 수 있는 상처였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을 보면 폭행이 의심되더라도 가족 모두가 폭행을 부정하거나 상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가지고 온다"며 "실제로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면 가족도 피해자일 수 있다.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단순한 의심만으로 신고를 하기에는 의사 입장에서도 난처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실제로 응급실에서 직접 신고한 적도 있었는데 신고 이후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가족의 협박을 들은 적도 있다"며 "현장에선 신고가 어려운 이유들이 다수 존재한다. 무작정 신고하지 못한 의사만 욕할 순 없다"고 전했다.
즉 신고를 하지 못한 의사 개인을 욕하기 보단 의료인들이 제때 신고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를 이번 기회에 들여야봐야 한다는 게 김 변호사의 견해다.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 A씨도 "물론 정인이 사건은 매우 안타깝지만 이를 가지고 의사의 면허취소를 논하고 온라인 청원까지 하는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며 "의사가 양부모와 공모해 허위 진단서를 작성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면허를 취소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아이의 상처를 구내염으로 잘못 보고 아동학대 신고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 현행법상 면허취소를 논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법만 있지 시행 기전은 유명무실…대안 논의할 전문가 협의체 조차 없는 현실
현행 아동학대범죄처벌특례법 제10조 제2항 제15호에 따르면 의사는 아동학대와 학대 의심사례가 확인되면 이를 반드시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즉 법률에 따르면 의료인들은 의심만 되더라도 의무적으로 아동학대 신고를 해야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현행법은 피해아동 스스로 부모를 신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료인을 포함한 어린이집·유치원·초·중·고교 교직원, 아동복지시설 종사자 등 24개 직군 신고의무자를 두고 있지만 2019년 기준 신고의무자에 의한 신고율은 23%에 그친다.
특히 이 중 의료인에 의한 신고율은 0.8%로 전체 3만8380건 중 단 293건에 불과하다. 미국의 의료인 아동학대 신고율이 14.5%인 것과 비교하면 무려 18배 가량의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의료인의 신고율이 저조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대병원 곽영호 소아응급의학과 교수는 정부가 법만 만들어놨을 뿐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은 전혀 갖춰놓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곽 교수는 "현재 아동학대에 대한 이해와 신고 프로토콜, 신고 이후 상황 등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의료인들이 많다"며 "이들은 의과대학, 전공의 시절 어디에서도 이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신고를 꺼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의료인뿐 아니라 신고 이후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경찰과 지자체 공무원들도 전문적으로 훈련이 돼 있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고자의 신원이 알려지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며 "특히 개원의 입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신원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신고율을 높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타 직종의 신고의무 대상자와 다르게 의료인은 환자 비밀유지의무가 있기 때문에 가벼운 의심만으로 신고를 하기 어려운 부분도 지적된다. 특히 비밀유지의무 위반은 자격정지까지 가능한 중형에 속하지만 신고의무에 따른 제재는 500만원 이하 과태료에 불과해 비밀유지의무를 택하는 의료인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의료법 제19조는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는 전자의무기록 작성 등을 하며 알게 된 다른 사람의 정보를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게 되면 3년 이상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 및 자격정지 2개월에 처해질 수 있다.
법무법인 윈스 조우선 변호사는 "의료인이 아동학대처벌법상 신고의무자임에도 신고율이 저조한 이유는 비밀유지의무와 신고의무가 충돌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며 "의사들이 비밀유지의무 위반 소지가 있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의심만으로 아동학대를 신고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장기적 관심 통해 전문가 TF 구성 필요…의료기관 보상체계 등 대안도
전문가들은 유명무실한 신고 의무제를 정착시키려면 사회 전반적인 인식 자체가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 정인이 사건처럼 사회적 이슈가 될 때는 너도나도 필요성을 지적하지만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자신의 권익을 꾸준히 주장하지 못하다보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곽영호 소아응급의학과 교수는 "아동 권익 문제는 대표적으로 정책연구도 많이 이뤄지지 않고 정책이 만들어져도 재정이 대다수 삭감되는 영역"이라며 "그러다 보니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나 처리 부분에서 전문가를 찾기 힘들고 그마저 지역별 편차가 매우 심하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아동 문제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아젠다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사회 전반적인 인식 자체가 변화될 필요가 있다"며 "그래야 의료인, 경찰, 아동보호기관 등이 모여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가 테스크포스(TF)도 구성할 수 있다. 협의체를 통해 지속적인 논의를 이어가면서 아동학대 신고와 처리에 대한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국회도 움직이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의원은 최근 "의료기관의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 신고자의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이 불거지자 경찰은 관계자에 대한 조사와 함께 교육체계를 강화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신 의원은 이런 조치만으로는 신고자인 의료인의 신분 노출 사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 것이다.
신 의원은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아동학대 의심 상황 발생 시 의료진은 의학적 소견만 체크하고 이런 정보가 전담기관과 연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신고 자체는 기관 차원에서 진행되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또 신 의원은 “필요하다면 아동학대 신고를 잘하는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인센티브 등 정책적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며 “신고 의무만을 강요하기보다 의료진이 안전하게 신고하고 아동학대 피해자 발굴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신 의원은 아동학대 정보 시스템과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UR) 시스템을 연계해 의료기관 피해 아동 알림 시스템을 구축하고 의료진이 아동학대 징후를 적극적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보상체계 등을 마련할 수 있도록 법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회 차원의 교육 시스템 강화도 약속됐다. 대한응급의학회 허탁 이사장은 "아직 아동학대 신고와 관련해 잘 알지 못하는 회원들이 많은 것 같다"며 "앞으로 학술대회 등 자리에서 아동학대 신고 관련 세션을 열어 홍보와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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