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시절 건강검진 결과 상담을 하던 때였다.
내시경 결과를 설명하면, 간혹 본인을 재외 국민(대개 한국 국적이지만, 외국 영주권을 갖는 경우)이라고 소개하며 말을 거는 환자들이 있다.
병원의 검진실이란 환자가 아파서 찾는 곳이 아닐뿐더러, 검진 환자 중 상당수는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본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예약을 잡아드린 경우가 많아 굳이 분위기가 심각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유독 그들(재외 국민)은 보통 이상으로 유쾌하고, 살짝 기분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쭉 지방에만 있던 나에게 그들이 구사하던 '서울사투리'와 영어 단어 때마다 터지는 매끄러운 혀의 굴림(이 정도면 Anatomy of Tongue root의 Normal variant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은 일정 수준의 교양과 만나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했다.
미국 수돗물은 뭔가 달라도 다른 건가?
그들의 한국에 대한 최종 인상은 오래 전 조국을 떠났던 시점에 머물러 있던 것 같다.
재외 동포들은 서울의 고층 빌딩 외형이 주는 세월의 변화 등등을 찬양하며 고국의 발전을 기특해했다.
하지만, 대화 주제는 곧 미국에 대한 찬양으로 바뀐다.
보통 "미국이란 나라는 말이죠~"로 시작하는 대화의 레퍼토리는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선진국인지, 미국이 얼마나 합리적인 시스템을 갖췄는지로 전개된다.
'나는 왜 여태껏 이런 대한민국 같은 후진 시스템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날 가져요 아메리카!'
하지만 그들의 그런 찬양도 '그들이 병원에 온 이유' 앞엔 무색해진다.
<출처 : hgupress.tistory.com>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건강검진은 몇 개의 검사를 패키지로 만들어 비급여 상품으로 내놓은 거다. 검진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가치의 모든 비용은 환자 본인부담이 된다.
하지만 검진 결과에서 이상 소견을 보이면, 특정 질환의 진단명 코드가 입력되면서 바로 급여모드로 전환된다. 환자는 이 질환에 대한 검사 및 치료 비용 중 일부만 부담하게 된다.
내시경 후에 발견되는 위궤양의 약물치료나 대장 폴립의 절제술 등이 그렇다.
미국보다 훨씬 저렴한 진료비인데 보험급여까지 적용받으면 재외국민들은 우리나라 의료제도를 찬양하기 바쁘다.
한 중년 남성은 미국에서 몇천 불씩 내야 했던 대장내시경 얘기를 꺼내며, 가족력 상 본인은 폴립이 많을 것 같아 절제술까지 받으려고 고국에 왔다며 귀띔해줬다.
그 중년 남성은 국내에 단 몇 달만 머무르며 약간의 보험료만 내면 본인도 내국인과 똑같이 보험혜택을 받는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재외국민들에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다름 아닌 조국이다.
"의료는 비용을 제대로 지급한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열심히 외국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조국을 잊지 않은 동포 여러분…
조국의 발전이 다 동포들 여러분 덕분인 거 아시죠?"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훈훈할 뻔했지만,
나는 그렇게 '대한민국 건강보험'을 이용하는 재외국민이, 면접이나 졸업 시즌에 정장을 샀다가 딱 한 번만 입고 다시 반품하는 '체리피커(Cherry Picker)'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재외국민 중 상당수는 한국과는 다른 삶을 찾아서 외국에 정착해 현지 정부에 세금을 내며 적응하는 사람들이다.
왜 우리가 그들을 위해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가?
그런 '체리피커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선진 시스템'에 한 걸음 다가서는 길이다.
의사들은 낮은 의료수가를 올려 달라고 노래 부르고 있고, OECD 통계는 대한민국 의료의 높은 환자 본인부담 비율을 말하고 있다.
난치성 질환이나 암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의료는 자가부담 비율이 높아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이 많다.
우리 쓸 것도 모자라는데,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의료적 자비를 베풀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참...
정도 많다.
의료는 비용을 제대로 지불한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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