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제도개선안, 법조계의 '사후적 잣대'를 넘어 분만실에 '형사 필터링' 방패를 허용하라
[칼럼] 김재연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대한민국 분만 인프라는 이미 무너졌다.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율은 수년째 바닥을 치고, 지방의 분만실들은 하나둘 간판을 내리고 있다. 청년 의사들이 분만실을 떠나는 이유는 단 하나, 고의나 중과실이 없어도 환자의 악결과가 발생하면 언제든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극도의 공포감 때문이다.
정부가 뒤늦게 '의료분쟁제도개선 협의체'와 '보험제도 협의체'를 가동하며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현재 진행 중인 논의를 바라보는 현장의 시선은 깊은 우려로 분노로 가득 차 있다는점을 분명히 밝힌다.
현재 '의료분쟁제도개선 협의체'의 위탁을 받아 대형 법무법인들이 수행 중인 연구용역의 시각은 여전히 추상적인 사후적 법잣대에 갇혀 있다. 법무법인 세종이 진행하는 '의료사고 설명의무 연구'나 법무법인 태평양이 맡은 '의료사고 심의위원회 구성 가이드라인' 등은 현장의 긴박성을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다.
묻고 싶다. 1분 1초를 다투는 분만실의 사투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활력징후를 직면하며 과연 교과서에 나오는 100% 완벽한 설명의무와 주의의무를 다할 수 있는 의사가 전 세계에 몇이나 되겠는가?
불가예측성과 긴박성을 외면한 채, 대한의학회가 수행 중인 '12대 중과실 유형화'에만 몰두하는 법적 판단은 필수의료진을 사지로 내몰 뿐이다.
정부가 2026년 필수의료 고액배상보험 사업에 국고보조금 82억3900만 원을 편성하고 지원 대상을 모자의료센터 및 응급의료기관 전담 전문의까지 확대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신생아실 중환자실 전문의는 빠져 있고 엉뚱하게 사후 배상 지원이나 보험제도 협의체에서 흘러나오는 배상보험 가입 의무화 법령(김태현 교수 연구용역)만으로는 현장의 '기소 공포'를 결코 해소할 수 없다.
이제는 사법당국이 의학적 판단의 영역을 임의로 재단해 의사를 전과자로 만드는 부작용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의료계는 무분별한 형사 고소·고발로부터 필수 의료진을 보호할 가장 확실한 법적 방어벽인 '형사 필터링(Filtering) 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촉구한다.
'형사 필터링 제도'란 의료사고 고소가 접수되더라도 수사기관이 즉시 피의자 입건이나 출석 요구를 하지 못하도록 유예하고, 의학적 전문성을 갖춘 기구의 1차 여과 과정을 거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이다.
수사기관은 접수 즉시 사건을 임상 전문가가 과반수 이상 참여하는 '(가칭)의료사고 전문심의위원회'로 이송해야 하며, 위원회는 철저히 현장 임상 데이터에 기반하여 면책 여부를 심의해야 한다. 태평양이 설계 중인 심의위가 구속력 없는 단순 '자문 기구'로 전락하지 않고, 실질적인 '형사 면책 필터' 역할을 하도록 하위법령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양수색전증이나 급성 이반성 자궁출혈과 같이 현존하는 의학 기술로 예측도, 통제도 불가능한 '초고위험군(Class I)' 영역의 사고이거나 임상 진료지침을 준수한 고위험 분만 시술(Class II)로 판정될 경우, 수사기관은 이를 근거로 즉각 '공소권 없음'이나 '내사종결' 처분을 내리도록 법적 구속력을 부여해야 한다.
의학적 특수성을 무시한 채 경찰과 검찰이 직권으로 입건하는 관행을 법적으로 차단하는 것만이 방어 진료와 인프라 붕괴를 막을 유일한 '소프트웨어적 방부제'다.
소비자단체가 요구하는 배상보험 전면 의무가입 및 미가입자 처벌 조항 역시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다. 초응급 상황에서의 진단 오류나 설명의무 미흡을 '중과실'의 굴레로 묶어 처벌하려 든다면 분만실의 빗장은 영원히 닫힌다. 처벌을 통한 강제가 아니라, 정부의 재정 지원을 확대해 고액 배상보험의 인센티브를 늘리는 것이 순리다.
다행히 최근 의협 등 의료계가 경찰청과의 간담회에서 필수 의료진 보호와 의료 자문 방안 마련에 뜻을 모은 만큼, 이를 실무 지침으로 구체화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정부에 강력히 건의한다. 관료와 법조인 중심의 탁상공론을 멈추고, 대한의학회와 각 전문과 학회가 축적한 임상 지침과 부작용 데이터베이스를 면책의 기준으로 수용하라. 실질적인 형사 면책 필터 역할을 할 수 있는 특례법과 시행령 제정만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메스를 잡는 분만실 의사들을 다시 환자 곁으로 불러모으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