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원을 운영하는 김모 원장은 얼마 전 당뇨를 앓고 있는 단골환자 A씨가 내원해 불안장애를 호소하자 항불안제 '자낙스'를 처방했다.
A씨는 김 원장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당뇨약을 처방 받고 있지만 불안장애 치료차 내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면 김 원장은 A씨에게 초진료를 받아야 할까, 아니면 재진료를 청구해야 할까?
참고로 복지부의 진찰료 산정지침에 따르면 초진환자란 '해당 상병'으로 동일 의료기관의 동일 진료과목 의사에게 진료 받은 경험이 없는 환자를 말한다.
진찰료 산정지침대로라면 A씨는 초진환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김 원장은 초진료를 산정했다가 심평원으로부터 삭감 통보를 받았다.
김 원장은 "자주 있는 일이라서 놀랍지도 않다"고 했다.
개원의들은 재진료 이야기만 나오면 부글부글 끓는다.
내과의원을 운영하는 이모 원장은 기자가 재진료 산정기준을 위반해 삭감된 적이 있냐고 묻자 "늘 있는 일이라 그리 황당하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에 살다보면 이 정도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2002년 2월까지 초재진료 산정기준은 명확했다.
환자가 내원한지 30일 이전에 다시 오면 상병이나 완치 여부에 관계없이 '재진료'를, 30일을 넘겨서 오면 '초진료'를 청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2000년 의약분업 이후 건강보험 재정 파탄 사태가 초래되자 다양한 재정안정대책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초재진료 산정기준 개선이었다.
보건복지부가 2002년 3월부터 지금까지 적용하고 있는 개정된 재진료 산정지침을 보면 '해당 상병의 치료가 종결되지 않아 계속 내원할 때에는 내원 간격에 상관없이 재진환자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당뇨, 고혈압처럼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하는 환자는 30일 주기로 내원하든, 1년 주기로 내원하든 무조건 재진료를 청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산정지침에 따르면 하나의 상병에 대한 진료를 계속하던 중 다른 상병이 발생해 동일 의사가 동시에 진찰하면 '초진료'가 아니라 '재진료'를 산정해야 한다.
이 산정지침을 적용하면 당뇨환자에 대해서는 '평생' 재진료를 받아야 하고, 이 환자가 감기, 소화불량, 불안장애 등 다른 상병으로 처음 진료를 하더라도 재진 처리해야 한다는 게 된다.
앞서 언급한 김 원장이 초진료를 청구했다가 삭감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함께 완치 여부가 불분명해 치료 종결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환자가 '90일 이내에' 내원하면 재진환자로 분류해야 한다.
개원의들이 더 분노하는 것은 '완치 여부가 불분명해 치료 종결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 표현이 자의적 해석을 낳고, 심평원과 건강보험공단의 삭감 빌미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Y정형외과 Y원장은 "감기 환자가 90일 안에 무릎을 다쳐서 내원했을 때 기존 진단명(감기)을 함께 기재해 초진료를 청구하면 삭감"이라면서 "그렇지 않고 무릎 치료만 기재하면 초진료를 인정하는 게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복지부나 공단, 심평원이 심사기준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기준 자체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다보니 별생각 없이 청구하다가는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삭감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그는 “심평원만 재진료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건강보험공단도 2~3년치를 모아 한꺼번에 환수하고 있다”면서 “두 기관의 파워게임에 개원의들만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상당수 개원의들은 삭감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자차트 초진을 환자 상병에 관계없이 무조건 90일로 세팅하고 있다.
이모 원장은 "결과론적으로 의료기관은 정당하게 진료하고도 수백만원 손해를 보고, 부당청구 사기꾼으로 몰리고 있다"면서 "사기꾼 소리를 듣기 싫어 아예 초재진 설정을 프로그램 상 90일로 세팅해 버렸다. 금전적 손해를 보는 게 차라리 속편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지방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한 정모 원장 역시 "열 받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거의 포기하고 산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찰료 산정기준에 대한 불만이 폭발직전에 이르자 의사협회는 최근 보건복지부에 재진료 산정기준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의협의 요구는 완치여부가 불분명해 치료의 종결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환자의 재진 기준을 '90일'에서 '30일'로 개정, 2002년 3월 이전으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의협은 "현 진찰료 산정기준은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하고, 진찰 행위가 대분분을 차지하는 일차의료기관의 사기 저하를 초래하고 있어 합리적인 기준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사협회와 기준 개선을 위해 협의중"이라면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추가 재정 투입 등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건강보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한 의사들.
건보재정이 안정을 넘어 누적흑자 20조원을 돌파한 현 시점에서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댓글보기(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