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정명관 칼럼니스트] “내 돈 내고 내가 치료하겠다는데 왜 내 마음대로 못하나? ”
의료전달체계 개선안이 의료계와 합의가 되지 않고 불발됐지만 상급종합병원의 비급여 폐지는 예정대로 지속되고 있다. 3대 비급여라고 하는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가 급여화됐거나 진행 중이다 의학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비용 문제에 따라 비급여로 놓여 있었던 초음파검사와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도 급여화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상급종합병원의 의료비 부담이 낮아져서 환자들이 대학병원으로 쏠리고 있다. 반면 중소병원과 의원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환자들 입장에서 보면 의료기관을 거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이왕이면 시설도 좋고 전문인력도 많은 종합병원을 이용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여길 만하다.
의원과 중소병원은 환자가 없어서 경영난에 시달리고 대학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나는 상황은 한마디로 의료자원의 배분에 실패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보건의료계의 오래된 과제였다. 이상적으로는 의원급에서 보는 것이 좋을 환자는 의원급에서 보고, 중소병원에서 보는 것이 나은 환자는 중소 병원에서 보고, 대형병원에서 봐야 할 환자는 대형병원에서 보는 것이다.
의원급과 병원급의 역할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는 급기야 대형병원의 의료비 본인부담금이 인하되는 정책이 나오자 환자들이 대형병원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환자들 가운데는 대형병원에 가는 것 보다 의원급에서 보는 것이 더 좋은 환자들도 많이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의료계 (주로 개원가에서는)는 볼멘 소리를 한다. 대형병원의 의료비 문턱을 낮추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말의 뉘앙스에는 의료자원의 배분을 의료비 지불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속내도 일부 들어 있다.
의료자원의 배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보면 두가지 정도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첫째는 앞의 지적처럼 의료비 지불 능력으로 배분하는 방법이다. 대형병원의 의료비 (본인부담금)가 높거나 대형병원 응급의료비가 높다면 환자들이 웬만해서는 대형병원이나 응급실로 바로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부자들에게는 좋을지 모르나 가난한 사람은 큰 병이 생겨도 수술이나 치료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대형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은 피할 수 있지만 큰 병에 걸리면 파산하거나 저소득층의 경우엔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배분 방법은 엄격한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여 각 단계에서 적절한 의료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의료자원의 배분에 의사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한다. 질병 예방과 대부분의 만성질환이나 간단한 급성질환은 일차의료기관에서 진료하고(주로 주치의가 이 역할을 한다) 정밀한 검사나 수술이 필요하다고 주치의가 판단했을 경우에 상급의료기관으로 의뢰하는 형식이다. 주치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의뢰한 환자의 진료비 본인 부담은 크지 않거나 무료에 가깝게 한다. 하지만 환자가 주치의의 의뢰 없이 바로 상급의료기관으로 가게 되면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응급환자일 경우엔 바로 큰 병원 응급실로 갈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당연히 응급실 의사의 판단에 의하여 진료 순서가 결정되어야 한다. 응급환자가 아닐 경우엔 진료가 거부되거나 고액의 진료비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평상시 진료이건 응급상황에서의 진료이건 의료자원의 배분에 의사의 역할이 중요해 지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내 돈 내고 내가 큰 병원에 가서 (의원이나 작은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치료받겠다는데 혹은 검사받겠다는데 왜 내 마음대로 못하느냐” 라는 말을 듣는데, 그것은 의료제도가 건강보험이나 국세로 운영되는 나라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의료비 전액을 자기 돈으로 내고 검사받거나 수술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적립해 놓은 의료비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거나 순서를 건너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의료비 100%를 본인이 부담하는 병원을 전체 의료기관의 10% 이내로 만들어서 운영하면 될 일이다.
위 두가지 의료자원의 배분법의 근본적 차이는 환자의 요구나 욕구 또는 지불 능력에 따라서 의료자원을 배분할 것인지 아니면 의사의 판단으로 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의료자원을 배분할 것인지 하는 점이다.
첫번째 방법을 따른다면 지불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고 큰 병원에도 갈 수 있다. 하지만 검사와 치료가 필요한데도 돈이 없어서 적절한 의료자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두번째 경우를 따른다면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적절한 검사와 치료를 비용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다. 반면 내가 원한다고 해도 의사가 필요없다고 판단하면 검사나 수술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의료자원 배분을 가격으로 통제할지 아니면 의사의 권위로 통제할지에 대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의료자원은 욕구에 따라 일반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과는 달리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배분해야 하는 특수한 상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의료계나 산업계의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는 두 번째 방법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돈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전국민이 주치의진료와 응급진료와 큰 수술 등을 필요한 순서대로 차별없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환자의 판단 보다 십년 이상 전문교육을 받고 의료에 종사해 온 의사의 판단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의료자원의 배분은 환자의 자율보다는 의사의 권위와 윤리와 전문지식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보장성 강화와 강력한 의료전달체계 구축을 시급히 이뤄야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또한 의료자원의 공정한 배분 역할을 해야 하는 의사를 폭력으로 위협하는 행위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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