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선거가 내년 3월 9일로 다가왔습니다. 각 후보캠프들이 여러 단체들로부터 정책 제안을 받아 대선 공약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는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짚어야 하는 보건의료정책 어젠다(agenda)를 사전에 심도 있게 살펴보고 이를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의료계 전현직 리더들의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의료계가 각종 악법에 대한 방어에만 급급할 게 아니라, 선제적으로 꼭 필요한 정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메디게이트뉴스] ‘의료전달체계 확립’이라는 명제는 총선, 대선, 정권교체, 쟁의 등 의료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중대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아직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의 가시적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나 의료관리 집단의 입장에서는 과잉 의료 방지나 의료비 절감이 주된 목적이고, 개원의나 중소병원은 대형병원의 환자 쏠림에 대한 대응이 주된 관심사로 보인다. 한편 환자나 환자단체의 목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의료접근성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진료를 더욱 싸고 손쉽게 획득하는 것이다. 이렇듯 의료전달체계의 명제는 얼핏 봐도 세 가지 다른 이해가 교차하는 의료 물결과도 같다고 하겠다.
동네 의원-대형병원 간 출혈 경쟁 구도 방치 전달체계 파괴만 가속화될 뿐
우리나라 의료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전문의 진료와 높은 접근성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 번쯤 외국에서 살아본 한국인이라면 우리나라의 신속하고도 값싼 진료를 칭송한다. 교민들이 필요한 진료를 받기 위해 급히 귀국해 바로 다음 날 원하는 전문의의 즉각적인 진료가 가능하다. 우리나라 전체 환자의 2/3 정도는 예약을 하지 않고 1차 의료를 담당하고 있는 동네 개원의를 방문한다고 한다. 의료접근성에서 재정적, 지리적, 사회 문화적 제한이 없는 환자에게 최대한의 ‘자유 이용권’이 주어진 셈이다. 그렇기에 3차 진료기관인 대학병원도 개원가와 제한 없이 경쟁을 하고 있다.
신속 진료는 대형병원도 가능하다. 응급실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응급이 아닌 경우 응급실 관리료를 부담시키기도 하나 응급실 사용의 억제 효과는 미미한 것 같다. 하루에 각기 3개의 다른 임상과목의 진료도 얼마든 가능하다.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정부의 주장에도 실제 우리나라의 환자 대기시간은 극히 짧은 편이다. 신속 진료와 높은 수진율이 가능한 것은 일차 진료가 짧고 기계적으로 변형됐고 환자는 주치의가 아닌 자기 판단에 의한 자기 진료의뢰를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의사 수가 많지 않아도 현재의 의료가 지탱이 되는 가설 설정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수진율이 세계 최고인 것은 의료쇼핑도 크게 한몫을 한다. 국민 소득이 4만달러를 상회하는 우리의 경제규모에서 현재 초진비용이 1만6000원이 조금 넘고 재진은 1만2000원이 안 된다는 사실은 의사와 환자의 개인적인 관계가 중시되기보다는 환자의 요구 충족이나 검사, 처치 등 낮은 진찰료에 대한 손실 보상 기전이 작동되는 의료로 이미 변질됐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정부의 낮은 초진료와 재진료 정책은 결국 값싼 의료의 과소비와 비급여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사 수가 많고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잘 정비된 나라를 보면 환자가 자신의 주치의를 만나는데 보통 1~4주가 소요된다. 개원의를 방문하는데도 약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나라 환자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건강에 대한 평소의 가치와 신념이 다르다 해도 자신이 질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심각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을 몇 주간 담담하게 버텨내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의료전달 체계가 잘 정비된 국가라 할지라도 최소 1주일 이상의 대기시간은 피하기 어렵다.
주치의에 의해 전문의 진료가 결정되는 문지기(gate keeping) 제도는 상급기관 의뢰에 대한 결정을 전적으로 주치의의 판단에 의존한다. 설령 주치의가 진료 의뢰에 대한 판단 시기가 늦었다고 해도 주치의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없다. 해외 법조인 경력의 지인은 식도암으로 사망한 환자의 주치의가 전문의 진료를 늦게 의뢰했다고 형사 고발한 건에 대해 주치의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을 보고 의료전달체계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의료전달체계가 잘 정비된 태국의 경우 환자는 미화 단돈 1달러로 신장 이식술까지 받을 수 있다. 신장이식은 도립병원의 책무로 신장이식을 이유로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할 수 없다. 수술 후 합병증이라면 모를까 의료전달체계가 법으로 정하여져 단계별 의료기관의 직무가 명확하다. 중산층이 없는 태국은 국민의 20%인 경제적 상류층은 사립 국제병원을 이용한다. 왕실부터 국제병원의 이용이 활발하다. 이런 불평등과 법제도에 의한 의료전달체계가 우리나라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의사라면 현재의 우리나라 의료의 약점인 환자와의 짧은 면담과 설명 부족, 그리고 검사나 처치에 의한 의료 환경의 개선을 희망한다. 의사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의사다움과 의료의 전문직업성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건강한 의료’의 지속가능성 정부 정책의 현명한 선택과 의료 환경에 좌우
우리나라도 예방의학자를 중심으로 미국의 내과협회가 주도하는 의료서비스 적정화를 위한 ‘현명한 선택(Choosing Wisely Campaign)’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전파하려고 애쓰고 있다. 의료적정성이란 이름으로 불필요한 진단, 검사, 치료, 시술을 배제하여 환자에 대한 위험과 위해를 감소시키는 것이 표면적 목적이나 과잉 의료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켜 의료자원의 낭비를 억제하고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 강화로 인간 중심적 의료로 의료비 절감을 도모하려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초진료로 1000달러도 청구할 수도 있는 다양한 제도가 공존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간단한 검사도 매우 고가이며 대기시간도 길다. 어떤 의료가 과잉이고 현명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의료수준이나 의료에 대한 기준은 바로 그 나라의 의료 환경이 좌우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의료 환경에 의한 현명과 과잉의 판단이 자칫 우리에게는 환자의 자유를 훼손시킬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의료전달체계가 우수한 나라와 우리나라는 일차 진료의 형태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현명한 선택을 위한 차분한 설명과 환자에 대한 설득과 교육은 환자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진료 형태에 비해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고려해 보면 비정상적으로 낮은 박리다매의 초·재진료를 바탕으로 의료전달체계를 논하는 출발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허공의 메아리로 보인다.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 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돼버린 의료전달체계를 정립은 초·재진 진료 형태의 변경과 여기에 상응하는 적정 노동 가치 산정이 최우선 해결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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