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어른들에게 '윤리'란 단어를 들이미는 것만큼, 민망하고 재미없는 일도 없다.
'개인의 윤리'는 알아서 챙기는 거고, 서른 넘는 개인 생각을 바꾸는 것도 무모하다.
그러나 최근 '신해철 사망', '다나의원 사건', '검진 병원의 성추행 사건'이 짧은 기간에 연달아 터지면서, 의사들의 '윤리'를 개인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됐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개인의 일탈'도 그 빈도가 잦아지면, 집단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제도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당장 보건복지부가 ▲비도덕적 진료행위 관리 ▲강화 면허신고 제도 개선 ▲보수교육 내실화를 내걸고 '의사 면허관리 제도 개선방안'을 제시한 상태지만, 의료계 내부에선 자율규제 강화 목소리가 나온다.
여러 의사단체는 변호사협회의 징계위원회처럼 일정한 권한을 갖는 자율규제를 희망한다.
일선의 의사들도 선제적 자정작용을 더는 '동료 등에 칼을 꽂는 행위'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의사 자율규제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프랑스와 영미권의 현재 상황과 역사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살펴봤다.
프랑스의 의사직업윤리법
프랑스 의사 단체는 의사윤리에 관한 규정을 자율적으로 제정한다.
자율 규정은 '의사직업윤리법(Code de déontologie médicale)'이라 불리는데, 국가의사회라는 단체가 제정해 '공중보건법(Code de la santé publique)'에 포함된다.
총 5개조 182개항으로 이뤄진 의사직업윤리법의 제1항엔, "의사회는 처벌권한을 갖는다"고 명시돼 있다.
처벌 권한은 '징계위원회(La Chambre Disciplinaire de Première Instance)'에 있는데, 이 회의는 정부가 임명한 법조인 1인과 '의료인 8인 + 비의료인 8인'의 총 17명으로 구성된다.
이 단체는 의사에게 면허 정지나 면허 박탈의 징계를 결정할 수 있다.
프랑스 징계위원회는 매우 많은 사례를 다룬다.
우리나라 경기도 정도에 해당하는 프랑스 한 지역의 경우, 5년간 약 6350건의 제소가 이뤄졌을 정도다.
이것은 의사나 환자 및 보호자가 제소한 것으로, 공공병원 의사의 경우 제소된 4명 당 3명(75%), 개인 병·의원은 제소된 의사 절반(46%)이 징계를 받았다.
중징계도 상당해, 공공병원 징계자 중 2/3(제소된 의사의 약 50%)와 개인 병의원 소속 징계자 1/2(제소된 의사의 약 23%)이 여기에 해당했다.
복권 절차가 없진 않지만, 꽤 까다롭다고 하며 피해 입은 환자나 가족에 경제적 보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프랑스 의료인 징계는 오히려 법조계나 시민단체에서 심하다는 의견을 피력할 정도로 꽤 엄격하다.
이런 직업윤리와 규율은 프랑스 국가 철학과 맞닿아있다.
영미권 자율규제의 역사 및 철학
18세기 후반 영국의 맨체스터공립병원은 환자가 많아 일손이 달리자, 의사를 늘리기로 한다.
하지만 기존 의사가 본인들의 동의 없이 인력을 늘렸다고 반발해 파업하자, 충격을 받은 병원 이사진들은 의사 도덕 윤리에 대한 기본적인 규율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사진의 요청을 받은 토마스 퍼시벌(Thomas Percival)이란 사람은 10년에 걸쳐 규율을 완성한다.
이 규율은 기본적으로 도덕(Virtue)을 강조했는데, "의사라는 직업은 고귀하기 때문에, 고귀한 덕성을 가진 사람이 의사를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초기 미국 의사 사회 역시 영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선민의식을 강조하면서 독점(Monopoly)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윤리를 내세웠다.
의사 사회가 만든 윤리 역시, 대부분 의사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고, 환자를 위한 조항은 단 2개뿐이었다.
그들이 만든 윤리엔 오히려 환자가 의사를 만났을 때 지켜야 할 예절, 예를 들면 '환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사에게 의견을 함부로 지시하면 안 된다'라든지, '환자들은 의사의 처방에 순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종의 에티켓에 관한 규율이었던 셈이다.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한 미국 의사들은 정치인을 설득해 '면허법'을 통과시켜, 본인들만 진료비를 받고 환자를 볼 수 있게 만든다.
면허법 폐지와 AMA의 윤리강령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귀족주의의 지속은 대중의 신뢰를 받지 못했고, 결국 엘리트 권리를 대폭 축소하는 '잭슨 민주주의' 역풍을 맞아 면허법은 폐지되고 다양한 대체의학과 무한경쟁하는 위기를 맞는다.
이 때 미국 의사들은 세력을 넓혀 힘을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의대를 무분별하게 늘리는 우를 범해, 의료 질은 떨어지고 의사 사회는 분열된다.
이 상황에서 미국 의료계 리더들은 '과학적인 의료 추구', '의학교육의 개혁', '전문화'라는 자율규제를 통해 의학이라는 직업 전문성을 정립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1847년 창립된 AMA(American Medical Association, 미국의사협회)는 기존 윤리의 시행착오를 거쳐 혁명적인 윤리강령(code of ethics)을 발표한다.
AMA는 윤리 기준을 성품(Character)에서 강령(Conduct)으로, 도덕(Virtue)에서 직업(Profession)으로 바꿨을 뿐만 아니라, 환자에 대한 의무를 윤리강령의 근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학자들은 AMA의 윤리강령도, 근본적으로 의사 사회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조합규칙(trade union rule)'이라고 지적한다.
제프리 벌란트(Jeffrey Berlant)는 의사들의 윤리강령이 신뢰유발장치(Trust inducing apparatus)를 만들어 의료서비스의 시장가치를 높이고, 이를 필수적 서비스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AMA의 윤리강령이 의사-환자 관계를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 관계로 만들어 의료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와 시민단체의 영향력을 무력화한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영미권에서 자율규제의 역사는 철저하게 의사들의 이득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의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이롭기 때문에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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