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의협, 수가 수준 낮고 정부의 건보재정 안정화하지 않아....지출 줄이기 전 국고지원금 30조원부터 보상해야
[메디게이트뉴스 임솔 기자]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미국식 대체지불제 모델을 따라가는 지불제도 개편안은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행위별 수가제를 대체지불제로 개혁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의료비 지출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점 때문이다. 2022년 OECD 보건의료통계에서 OECD의 평균 GDP 대비 경상의료비는 9.7%였고, 미국의 GDP 대비 경상의료비는 18.8%로 최고 수준을 보였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의 GDP 대비 경상의료비 지출은 OECD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고,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8.4%로 나타났다.
병의협은 22일 ‘대한민국 의료 왜곡의 근본 원인에 대한 해결 없이 추진되는 지불제도 개편의 위험성과 문제점’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지난 7월 28일 감사원은 건강보험 재정관리 실태에 대한 감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케어의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건보재정 지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묶음 수가제를 확대해 현재의 행위별 수가제로 인해 발생하는 의료비 증가를 통제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감사원은 묶음 수가제 확대의 명분으로 해외는 묶음 방식의 지불제도를 도입해 재정 총량을 관리하고 있고, 보건경제학회 전문가들이 지불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웠다.
이에 병의협은 "감사원이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묶음 수가제는 미국 메디케어 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대체지불제의 한 형태다. 이미 국내에서도 3~4년 전부터 심사평가체계 개편 논의가 이뤄지면서 대두된 '가치기반 지불제'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 바 있다"라며 국내 현실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병의협은 미국식 지불제도 개편안이 국내에 맞지 않는 두번째 이유로 현재 대한민국의 수가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평균 외래 진료 일수는 OECD 국가 중 1위이고, 입원 치료 기간은 일본 다음으로 긴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병의협은 "의료 이용량과 행위량을 통제해 의료비를 강제로 줄여버리면 의료기관들의 경영난은 심화하고, 폐업하는 의료기관들이 속출한다. 민간 의료기관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현재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서 의료기관들의 경영난과 줄폐업은 곧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인 만큼 저수가의 정상화를 동반하지 않는 지불제도 개편안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병의협은 세 번째 이유로 건강보험 재정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노력을 정부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21년 OECD 보건의료통계를 보면 경상의료비 중 정부 및 의무가입제도 비중에서 대한민국은 2019년 기준 61.0%로 OECD 평균인 74.1%보다 현저히 낮았다.
병의협은 "경상의료비 전체 규모는 OECD 평균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데 경상의료비에서 차지하는 정부나 건강보험의 비중이 낮다. 이는 단일 공보험 제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의료 재정에 대한 정부의 공적지출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현재의 건강보험 제도로는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법률에 규정된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고지원 금액을 30조원 가까이 지급하지 않고 있고, 이러한 국고지원 법률 규정도 올해가 지나면 사라진다"라며 "단일 공보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부가 건강보험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건강보험 재정의 안정화를 명분으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지불제도 개편을 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순서에 맞지 않다”고 했다.
대제지불제, 의료질의 저하와 과소진료의 문제
병의협에 따르면 행위별 수가제는 의료기관에서 과도하게 의료 행위를 하고 이를 청구할 경우 이를 통제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자칫 의료비가 급격하게 상승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행위별 수가제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 및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포괄수가제, 묶음수가제, 에피소드 기반 지불제, 가치기반 지불제, 인구기반 지불제, 총액계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는 대체지불제이다.
가치기반 지불제(Value-based Payment, VBP)는 환자에게 제공되는 치료 결과를 중시하는 지불제도다. 여기서 '가치'란 환자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 대비 의료의 질과 치료 결과를 의미한다(가치 = 질(치료 결과) ÷ 비용). 즉, 소요되는 비용이 적으면서도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료의 질과 치료 결과가 우수한 경우를 매우 가치가 있다고 보는 제도다. 가치기반 지불제에서는 가치 있는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그렇지 않은 의료기관에는 디스인센티브를 주도록 돼있다.
병의협은 "평가에 비용이 포함되기 때문에 과소진료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과 항목의 적절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 자칫 편향적이고 주관적인 평가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묶음 지불제(Bundled Payment)는 대표적으로 진료 에피소드별로 묶어서 지급액을 미리 결정해서 지급하는 형태인 에피소드 기반 지불제(Episode-based Payment)의 형태와 특정 지역 내의 의료기관들을 하나의 진료조직으로 묶어서 미리 정해진 지급액을 배정하는 미국 ACO(Accountable Care Organization, 책임진료기구)와 같은 형태가 있다. 에피소드 기반 지불제는 의료공급자에게 해당 에피소드 진료 기간 동안 환자가 받는 의료서비스의 질과 비용에 대해 모두 책임을 지도록 한다.
병의협은 "미국 ACO 형태의 묶음 수가제는 쉽게 말하면 지역별 총액계약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배정된 총액이 남게 되면 남은 금액은 해당 조직에 인센티브로 지급하고, 진료 총액이 배정된 총액을 넘기게 되면 총액을 넘긴 금액만큼은 해당 진료조직이 손해를 봐야 한다"고 했다.
병의협은 "입원 환자에게 적용되는 질환별로 총액이 정해져 있는 대표적인 형태의 수가제인 포괄수가제가 유발하는 의료질의 저하와 과소진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현재 대다수 해외 선진국들이 의료의 질 저하를 막기 위해 의사의 의료 행위에 따라서 수가를 추가지급할 수 있는 변형된 형태의 포괄수가제를 도입하고 있다"며 한계점을 지적했다.
의료필요도 높은 환자 진료하면 재정적 손해, 진료 기피 우려
의료정책연구소는 지난 2020년 1월 '미국 대체지불제도(Alternative Payment Model)의 현황과 시사점'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대체지불제도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고, 각 사례의 내용 및 문제점 등을 언급했다.
연구보고서는 대체지불제의 문제점을 성과에 대한 지불방식, 묶음지불방식, 절감분이나 위험을 공유하는 지불방식에 따라서 나눠 분석하고 있다. 먼저 성과에 대한 지불방식, 일명P4P(Pay for performance) 방식의 문제는 행위별 수가제 구조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P4P 방식은 의료제공자에 대한 추가 비용의 지불을 통해서만 높은 가치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의료비 절감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또한 P4P 방식은 ‘성과 보고’와 관련된 의료제공자의 행정적 부담을 증가시키면서도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적절하게 제공하는지 확인이 어려운 문제도 있으며, 높은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의료제공자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중환자나 위험한 환자를 기피할 우려도 있다. 절감분 공유(Shared Savings) 및 위험 분담(Shared Risk) 지불 방식 역시 의료의 질에 대한 보상이나 패널티 방식이 P4P 방식과 같기 때문에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는지에 대한 확인이 어렵다.
미국이 확대해 온 절차 기반 에피소드 지불방식(Procedure-Based Episode Payment)과 인구집단 기반 지불방식(Population-Based Payment, 일명 인두제(Capitation))은 묶음지불 방식이다.
병의협은 "묶음 지불제는 의료비 통제에 있어서 용이한 방식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묶음지불 방식의 경우 특정 의료서비스에 대한 추가적인 지불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부적절한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가능성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밝혔다.
병의협은 이어 "묶음 지불제의 경우 의료제공자는 의료필요도가 높은 환자를 진료하는 경우에 오히려 재정적 손해가 발생할 수 있기에 중환자 및 비용이 많이 드는 환자를 기피하게 될 우려가 높다. 환자도 자신이 원하는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의료비 강하게 통제하면 필연적으로 부작용만 따라올 것
병의협에 따르면 카테고리1은 의료 질이나 가치에 대한 평가와 연계되지 않는 전통적 방식의 행위별 수가제 모델이고, 카테고리2는 P4P 방식을 포함하는 의료 질이나 가치에 대한 평가와 연계되는 방식의 행위별 수가제 모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행위별 수가제는 카테고리2 모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카테고리3은 절감분 공유 및 위험 분담 방식을 도입한 행위별 수가제 모델로, 앞서 언급했던 대부분의 묶음 지불제의 형태가 이 모델에 해당한다. 감사원이 묶음 지불제 도입을 주장한 것은 지불제도를 카테고리2에서 카테고리3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병의협은 대체지불제의 최종 지향점이 바로 카테고리4 모델이라며 우려를 제기했다.
병의협은 "이는 바로 인구기반 지불제다. 인구기반 지불제는 1인당 의료비를 미리 정해놓고 지급하는 인두제와 국가 전체 의료비 총액을 미래 정해놓고 의료 재정을 운영하는 총액계약제를 적절히 융합시킨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인두제와 총액계약제 모두 의료 재정을 미리 정해놓고 지불한다는 점에서 의료비를 가장 강하게 통제하는 방식의 지불 체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구기반 지불제 역시 의료비 총액을 정해놓고 재정을 운영하는 지불 체계라고 볼 수 있다"라며 "의료비를 강하게 통제하는 이러한 지불 체계는 필연적으로 과소 진료와 의료 질 저하, 부적절한 의료 행태 조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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