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배진건 칼럼니스트] 2013년 5월 영국의 한 마라톤 대회에서 선두로 달리던 한 명을 제외한 5000여명이 단체로 실격 처리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1위 선수와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2위 선수가 길을 잘못 들면서 그 뒤를 따라 달리던 선수 5000여명이 모두 코스를 이탈한 것이다. 결국 2위 선수를 비롯한 모두가 결승점을 통과하고도 264m를 덜 뛰었다는 이유로 전원 실격 처리 되는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이 기사를 읽으며 지난 30년간 ‘신약개발’을 위해 달려온 대한민국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했다.
앞에 가는 사람만 믿고 결승점까지 힘껏 달렸는데 얻은 것이 별로 없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다. 지난 10년의 한국에서 지낸 신약개발자로의 필자 개인의 모습도 회사의 연구개발을 책임지는 리더로써 그저 앞 사람만 보고 미련하게 달린 것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올림픽 모토(motto)인 ‘Citius, Altius, Fortius’ 즉,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가 바로 신약개발의 모토라고 생각한다. 시장은 효과(efficacy)가 더 빠르게 나타나고 적은 양으로도 약효가 좋은 더 높은 것 그리고 안정성(safety)이 더 강한 것을 요구한다. 더구나 같은 계열의 약물이 출시 순서로 봤을 때 대략 동메달까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 같다.
2012 런던올림픽의 대한민국 영웅 양학선은 차별화(differentiation)의 정수를 보여줬다. 필자 자신도 과제를 심사할 때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것이 ‘차별화’다. 지금 경쟁 대상 개발과제들과 무언가 차별화 포인트가 뚜렷하면 그런 과제는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과제를 평가하고 투자를 장려했다. 양학선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최고난도 기술 ‘양1’을 개발함으로써 차별화의 세 가지 방안, 즉 최초(the first), 유일함(the only), 최고(the best)를 모두 이루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은 다음은 ‘양2’로 승부할 것’이라는 당찬 포부이다. 필자가 항상 묻는 것이 지금 개발하는 것 외에 ‘후보물질(backup compound)’이다. 지금 나가는 것에 문제가 생길 것에 대한 대비책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갈 수 있는 ‘후보물질(backup compound)’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 양궁이 35년 이상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스포츠에 접목시킨 창의적인 훈련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을 최대한 이용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새 훈련 방법을 개발하면 외국 지도자들(대부분 한국인 양궁 코치)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내는데 약 6개월이 걸린다. 6개월 후엔 그들도 더 발전된 방법으로 훈련하기에 그 6개월간 우리는 전보다 새로운 것을 또다시 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 신약개발을 하는 많은 사람들 중 ‘기회의 창’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과제의 보이지 않는 경쟁자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서둘러야 한다. 한 달의 지연도 용납할 수 없이 계획대로 진행돼야 한다. 우리 양궁 지도자들은 6개월이란 그 ‘기회의 창’을 의식하면서 훈련했던 만큼, 오랫돈안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한국 펜싱이 보여준 차별화가 더 한국적 신약개발에 적합하고 현실적이다. 펜싱은 먼저 문제점을 파악했다. 유럽 선수들에 비해 키가 작고 팔 길이가 짧은데도 손 기술 위주의 유럽 스타일을 모방만 해 왔다. 가장 중요한 변화로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에 맞는 기술 연구에 돌입해 발동작을 빠르게 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펜싱 선수들이 느닷없이 등산과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등 하체 강화 훈련에 몰두한 이유다. 이렇게 단련된 우리 선수들은 런던올림픽에서 빠른 발로 치고 빠지면서 유럽 선수들의 얼을 빼놓았다. 우리 선수들의 1분당 스텝 수는 최대 80회로 유럽 선수들의 2배 수준이고, 빠른 스텝을 이용해 1초 동안 5m를 이동하기도 했다.
자신의 약점을 먼저 파악하고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차별점을 만들지 못 하면 동종 최고(Best in class)를 만들 수 없다. 차별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천히 깊게 고민해야 한다. 그저 앞에 보이는 선수를 따라 뛰다가는 그저 탈락하는 마라톤 선수가 될 수밖에 없다.
신약개발의 로드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표제품 특성(TPP, Target Product Profile)이다. TPP는 앞으로 12년 간(필자가 임의로 정한) 신약개발 과정의 꼭 필요한 기본계획서이자 로드맵이다. TPP는 소비자들에게 약이 어떤 것이라 쓰여 있는 라벨링 개념(labeling concepts)에서 시작한다. TPP는 신약개발에 참여하는 모든 부서가 참여해 작성하고 점점 더 좋게 진화하는 ‘살아있는 문서(living document)’다.
이것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시장에서 요구하는 미충족 의료요구(Unmet medical Needs)를 구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개발하려는 제품의 시장요구 충족 예측전략을 수립해 출시 예측시점의 목표제품 특성을 환자가 패키지 삽입(insert package)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정해야 한다. 힘들고 긴 마라톤을 달릴 선수라면 코스를 미리 둘러보아 점검해 보고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뛰겠다고 미리 천천히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 중에서도 첫 단초인 임상에서 실현 가능한 타깃을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혁신신약개발과 해외수출로 바이오 강국 코리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라고 굳건히 믿는다. 양학선의 차별화는 신약개발로 보면 가장 의미 있는 혁신신약(First-in-class)이다. 그러나 이런 케이스는 드물고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갈 길이고 살 길이다. 그 미래를 위해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라고 외치고 싶다. ‘천천히 서둘러라’는 중세 연금술사들의 좌우명이다.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말이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모순이지만 전후좌우를 철저하게 따져 보면서 서두르라는 말이다. 현대의 연금술사들인 신약개발 종사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후발주자인 대한민국 신약개발자들에게는 더더욱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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