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2.07.16 06:55최종 업데이트 22.07.16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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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가리 찢어진 사회에 대한 우려, 독일 국민들의 현명함

[칼럼] 장성구 경희의대 명예교수, 전 대한의학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훌륭한 분들이 많다. 그분들을 통해서 삶의 철학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경륜과 철학을 겸비한 분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크나큰 장점과 미덕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이 있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칼럼과 외국 문화와 역사적인 지식의 습득과 체험담을 글로서 전해주시는 이성낙 총장이다. 그는 독일 뮌헨의대를 졸업하고 피부과 전문의로서 독일 현지 대학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 연세대, 아주대, 가천의대에서 봉직하고 가천대 명예 총장으로 퇴임했다. 피부과학에 대한 훌륭한 학문적 업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년퇴임 후에는 다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정진해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문화와 예술 분야에 대한 지평이 넓은 분이다. 저서 중에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이 대표 저서로 알려져 있다. 영정이라는 우리 고유한 초상화 영역에 담겨있는 선비의 정신세계와 철학을 섭렵하고 피부과 전문의의 식견으로 얼굴에 나타난 주인공의 건강상태를 들여다보고 있는 책이다. 
 
필자는 글을 쓸 때 종종 이 총장의 시론과 칼럼 속에 담겨져 있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혜의 지평을 살펴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善)을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듯이 지난 정부 5년 동안의 삶 역시 사람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고 각자 개인적 삶의 품격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가치와 척도를 통해서 당시의 행위가 당위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분명 편협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반일(反日)이라고 생각되는 정책의 추진에 잇따른 ‘죽창가’ ‘토착왜구’ ‘친일 문화인 척결’과 같은 단어의 등장은 분명 방향성을 잃은 돌팔매였다고 생각한다. 국격(國格)을 정립하고자 하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를 빌미로 역사적 견해에 맞지 않는 궤변과 주장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만용이고 역사를 농락하는 것이다.
 
역사의 중심에는 포용과 척결이라는 양날의 칼이 항상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척결이라는 칼날을 잘못 휘두르면 엄청난 상처와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기 때문에 지식과 지혜를 통한 역사적 식견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의 속담에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해학 속에 엄중한 경고가 내포된 말이다.
 
오늘날 중국의 국가(國歌)인 ‘의용군 행진곡’은 국공내전 때 현재 중국 공산당 정부와 대척점에 서있던 국민당 국민혁명군 200사단의 사단가 이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 후 이 노래를 국가로 사용해 오고 있다. 한 때 과거 적군(현 대만정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당)의 사단가라는 이유로 폐지가 논의됐다가 결국은 그대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의미를 한참 되새겨 볼 만한 일이다.
 
나치 추종자들에 대한 독일 정부와 국민들의 엄정함은 때로 좀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이다. 히틀러 정권이 멸실 된지 벌써 수십여 년이 흘러갔지만 요즘도 간혹 과거 나치 추종자들을 색출하여 엄단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의 이러한 엄격한 잣대에도 불구하고 나치독일 치하에서 베를린 교향악단을 지휘했던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나 헬버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에 대해서는 전후 독일의 어떤 정부도, 독일 국민들  누구도 전범자로 처벌하거나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1942년 베를린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고 있을 때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곡을 작곡하고 지휘했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칭송받는 작곡가 김동진 교수는 1939년 만주 신경교향악단 바이올린 작곡을 담당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었기 때문에 북한 치하에서 견디지 못하고 사선을 넘어 월남한 뒤 대한민국 사회에 무수한 예술적 공헌을 했다. 
 
이렇게 만주국과 연관된 이 두 분들은 모두 친일파로 분류 당해 많은 고초를 격고 있다. 이를 근거로 애국가를 바꿔야한다는 주장이 진영논리의 바람을 타고 심심치 않게 거론 되고 있다. 또한 김동진 작곡의 모든 음악을 방송금지해야 한다는 등 개인적으로 씻을 수 없는 모욕과 치욕을 퍼부었다.
 
불분명한 사실에 근거한 선동과 정권에 대한 광신적 팬덤의 완장 찬 권력은 역사의 심판관이라도 된 양 난장판에 가까운 목불인견의 추태를 벌렸다. 
 
한쪽에서는 친일파 명단을 수록한 사전을 발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친일파 사전 발간 자들의 주류가 과거 좌익에 섰던 사람들이라는 주장과 함께  좌익 부역자 명단 사전을 발행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이 모두 시대에 역행하는 어이없는 일이다. 어느 것이 국가와 사회의 미래지향적인 일인지에 대한 생각의 한계가 드러나는 행동으로 보인다. 나라의 분열을 걱정하는 식자들에 의해 좌익 부역자 명단 사전의 제작이 중단돼 다행이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지난 정부의 철학부재가 사회적 혼란을 부추겼다. 정부는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친일파에 대한 국가적인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고 사설단체의 임의적 결정에 부화뇌동한 어정쩡한 꼴을 보인 것이다. 어릴 적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에 학예회 연극을 늙어가면서 다시 보는 기시감이 들었다. 
 
미술계에는 누가 봐도 친일 행적이 각인돼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마치 개인적 분풀이에 따라 친일파로 매도한 듯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월전 장우성일 것이다. 그는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이 전시회의 경우 항상 일본인이 조선총독 앞에서 감사의 인사말을 했다. 총독부에서는 패전이 짙은 전쟁말기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러한  관례를 깨고 조선 사람인 월전 장우성에게 인사말을 하도록 했다. 일본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던 그는 일본말 발음을 우리말로 적어서 인사말에 대신했다고 한다. 
 
당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족 신문이 모두 폐간되고 우리말 신문은 오로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 존재했던 때다.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월전 장우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장우성이 친일을 했다는 결정적이고 가장 큰 증거이다. 당시 상황을 그려 본다면 매일신보의 이러한 논조의 기사 내용은 얼마든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총독부 기관지로써의 사명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장우성은 문재인 정권 5년 내내 핍박의 대상이 됐고 항상 그렇듯이 여기에도 완장 찬 사람들은 기세등등한 점령군 행세를 했고 여기에 일부 인사들이 부화뇌동했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아주 낯선 단어를 알게 된 것이 있다. 농단(隴斷)이라는 말이다. 농단은 장사꾼이 상대방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가 감시하고 거기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익을 독차지하는 행위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차용한다면 지난 정권에서 생뚱맞은 자기들 기준의 반일운동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른 것은 마치 역사농단이라는 말을 부쳐주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어느 골프장에 몇 번 간 일이 있다. 그 곳은 입구에 아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큰 나무가 서 있는 것이 유명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나무가 없어진 것이다. 직원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어느 사회단체에서 그 나무의 원산지가 일본이니까 당장 베어내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골프장의 역사를 품고 있는 상징물이라 차마 베어낼 수는 없어서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는 후미진 곳으로 옮겨 심었다는 것이다. 이는 혼탁했던 시대였음을 대변하는 역사의 증거가 될 만한 황당한 갑질 같은 떼거지다. 
 
전교조는 자기들이 근무하는 학교의 교가를 친일파로 분류된 음악가가 작곡한 경우 교가를 폐지하도록 학교 측에 협박을 가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홍위병이 공자의 사당을 때려 부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만행이다. 자기들 기준으로 생성한 살생부를 집행하는 염라대왕이라도 된 듯하다.
 
필자는 항일의병에 참여했다 가산을 탕진한 시골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일의병에 대해 일천한 지식밖에 없는 무지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항일의병 정신은 결단코 이렇게 천박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과거 5년동안 항일의병 정신은 처참하게 훼손됐다. 아무리 숭고한 정신도 서슬 시퍼런 권력의 칼에 의해서 너덜너덜 걸레 조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그러나 이렇게 무지한 패거리의 떼거지 행위와 정치적 의도에 의한 역사농단이 지속된다면 이 사회는 갈가리 찢어진 사회가 돼 깊은 상처만 남게 될 것이다.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일제강점기 때 쇠스랑 들고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고, 순사가 무서워 숨어 숨 쉬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어렵게 공부하며 살았던 그때 그 사람들의 후손들은 오늘날 모두 토착왜구에 해당한다.
 
누구보다도 많이 배웠다는 자들의 어이없고 한심한 작태를 바라보면서 독일 국민들의 현명함이 더욱 부럽다.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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