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4.01.09 04:58최종 업데이트 24.01.09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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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세워서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다면 멈춰 세워야만 한다

부제: 총액계약제란 쓰나미가 몰려온다

[칼럼] 주수호 미래의료포럼 대표·전 대한의사협회장

제88회 의사국가시험 69번 문항의 답이 '총액계약제'다. 사진=미래의료포럼 

[메디게이트뉴스] 과거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의료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서 한참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매년 급격히 증가하더니 급기야 2022년에 OECD 평균 위로 올라섰다. 국가 전체의 의료비 지출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뜻이다. 증가폭이 상당히 이례적이다.

OECD도 한국을 콕 짚어서 따로 그래프를 그렸다. 얼마전 이 그래프를 보고 이제 총액계약제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료비 지불방식을 바꾸자는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종착점은 총액계약제다.
 
올해 의사 국가시험 문제에 이 그래프를 올려놓고 "한국의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진료비 지불방법은 무엇인지"를 묻는 문제가 출제됐다. 의대 증원의 파도를 넘어서면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이제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총액계약제의 쓰나미는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총액계약제는 총 의료비를 묶어놓고 각 의사들의 행위량에 따라 분배하는 방식이다. 행위별 수가제는 행위에 따른 수가를 주는 방식이라서 행위량이 많아지면 총 의료비도 증가하지만 총액계약제는 총 의료비는 고정시키고 행위에 따른 포인트를 주는 방식이다. 연 단위로 모든 포인트를 모아서 총 의료비를 총 포인트로 나누면 포인트당 수가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행위량이 아무리 많아져도 총 의료비는 고정이고 개별 의사는 포인트를 많이 쌓아야 조금이라도 더 받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포인트를 더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행위, 즉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포인트당 수가는 떨어진다. 지옥문이 달리 지옥문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자. 한국에 건강보험이 도입된 지 벌써 46년, 반세기 가까이 된다. 건강보험 도입 당시 관행수가의 50~60%선에서 보험수가를 정하고 시작됐다. 2006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상대가치점수 연구개발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의과의 원가보전율은 73.9%로 계산됐고 진료과별로는 소아과가 34.2%로 가장 낮았다. 한의원의 원가보전율은 92.7%로 계산됐는데 특히 기본진료와 관련한 의사 업무량과 진료비용이 낮기 때문에 한의원 기본진료의 원가 보전율이 200%가 넘는 것으로 추계됐다. 약국의 원가 보전율은 125.6%였다.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 의사들은 턱없이 낮은 수가를 감내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 성과는 OECD 데이터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은 적은 비용으로 의료접근성이 가장 좋은 나라 최상위에 자랑스럽게 위치하고 있다. 한국의 병원을 이용하기 위해서 귀국하는 교포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국민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을 의료천국이라고 부르는 교포, 외국인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OECD 데이터에 의하면 한국의 진료비 단가는 OECD 평균(100)을 기준으로 55에 불과하다. 의사들이 돈을 벌었다면 진료비를 뻥 튀겨서 돈을 벌은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반토막에 불과한 저수가에도 정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은 것이다. 그런데 마치 환자들을 등쳐서 돈을 갈취한 것처럼 의사들에 대한 적대감이 넘친다. 그리고 이제 총액계약제의 망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은 묶어 놓고 의사들끼리 무한경쟁을 시켜서 혜택은 계속 더 누리겠다는 것이다.
 
이미 의대정원 증원은 의사들이 반발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밀어붙일 태세다. 얼마 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3년 5171만명인 한국의 인구수는 2050년 4333만명까지 급격히 감소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의 의대 입학정원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해도 인구 1000명당 의사수는 2043년 4.2명, 2050년 5.0명으로 OECD 평균 3.7명을 훌쩍 넘어선다.

한국의 의사 증가속도는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편에 속하는데,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 의사 과잉을 피할 수 없다. 의사수의 증가속도를 조절해야 할 타이밍에 거꾸로 의사수를 대거 늘리겠다는 것이다.
 
의사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의료비가 더 지출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의사수를 늘리겠다면서도 그런 걱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총액계약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총액계약제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의사들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쓰나미다.
 
주변에서 간혹 의사들이 정치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정치력만으로는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예전에 대한의사협회가 의료법과 건강보험법의 불합리한 조문들에 대한 연구 용역을 발주한 적이 있었다. 연구를 수행한 법조인이 조목조목 법적으로 불합리한 부분들을 지적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가 다 끝나고 그 법조인에게 “이제까지 조목조목 불합리한 부분들을 지적해 주셨는데, 만약 당신에게 절대 권한을 준다고 가정하면 그 불합리한 부분들을 모두 다 개정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법조인의 대답은 이랬다. “절대로 안 바꾸겠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은데 왜 바꿉니까?”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그만큼 의사들에겐 불리한 법이지만, 국민들에겐 유리한 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 발간된 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의료패널 기초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응급의료이용 만족도 조사에서 전반적인 만족도의 불만족율은 3.8%에 불과했다. 입원의료이용 만족도 조사에서 불만족율이 가장 높은 것은 '입원 비용에 대한 불만족'이었는데, 이것조차도 불만족율이 8.5%에 불과했다. '입원 시 과잉진료 경험율'은 3.0%였고, 지난 1년간 병의원의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었지만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제적 이유로 인한 미충족 의료율’은 2.6%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 부담돼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의료서비스에 불만족인 사람도 거의 없다. 병원에 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시간내기 어려워서’다. 세상에 그런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모두가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다면서도 의사 이야기만 나오면 무슨 악의 축을 대하듯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서비스는 충분히 만족하는데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것 같아서 배가 아프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버는 돈을 대폭 줄이기 위해서라도 의사수를 큰 폭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아플 때 의료 서비스를 못 받을 정도로 의사수가 부족해서, 의료서비스를 받아보니 의사부족으로 서비스가 너무 형편없어서 의사수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큰 불만인 '내가 병원에 갈 시간을 내지 못해 못간다'는 사람이 7% 남짓에 그치고 국민 대다수가 의사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의료서비스에 충분히 만족하고 비용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의사들이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것 같아 의사수를 대폭 늘리자는데 쌍수 들고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정치력이 발휘될 수 있을까?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자료를 정리해서 언론에 기고를 해도 ‘국민 정서’에 반하는 내용이라고 외면하는 언론이 차고 넘치는 사회에서 정치력이 힘을 발휘한다고 믿으면 어리석은 것이다. 불합리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으니 절대로 못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렸는데 정치력만으로는 절대로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치력이란 공명불에 불과하다. 흔히들 의사사회는 각 전문과별 이익이 다 다르기 때문에 뭉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들을 갈라놓기 위한 프레임일 뿐이다. 미국 의사회가 전문과별 이익을 내려놓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일본 의사회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쓰나미가 몰려오는데 각자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면 모두가 공멸한다. 쓰나미가 목전에 당도하기 전에 시급히 조직을 정비하고 힘을 키워서 거대한 파고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의 최종 목표가 단순히 쓰나미를 피하는 것만이 돼서는 안 된다. 교과서적 진료환경, 내 자식, 내 가족과 후배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의사와 국민 모두가 행복한 진료 환경’을 만들 때까지 가열차게 매진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들밖에 없다.

일시적으로 의료를 멈춰 세워서 올바른 길로 계속 갈 수 있다면 멈춰 세우는 것이 의사가 주체가 되는 의료개혁의 시작이 될 것이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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