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대한병원의사협의회가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며, 시행규칙 마련과 의료법 개정 등 현실적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의협은 26일 입장문을 통해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할 우려가 있다며, 문제점을 조목 조목 지적했다.
한의사 초음파 기기 '금지' 규정 없으니 가능? 기존 의료법 규정 적용해야
병의협은 먼저 대법원이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취지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판결 근거로 삼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미 의료법에서는 진단 X-ray, CT, MRI 등의 장비를 설치 및 운영하는 의료기관에 대해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를 초음파 기기 등 다른 의료장비에도 적용해 한의사의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합당한 해석이란 것이다.
병의협은 “현대 의학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고 다양한 새로운 의료장비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새 의료장비들이 도입될 때마다 이에 따른 법령을 새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며 “따라서 기존 의료법에서 규정한 의료장비의 사용 기준에 따라 다른 의료장비들에도 기준을 적용하는 게 옳다. 의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의과 의료기기는 의학을 전공한 의사만 사용하는 게 맞고, 이는 국제적 상식”이라고 했다.
이어 “의료기사법에는 초음파 진단기기를 취급하는 의료기사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에 의사 또는 치과의사만 규정됐을 뿐 한의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한의사가 초음파를 직접 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거나 그럴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그런데 한의사가 직접 초음파를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 없으므로 한의사가 초음파를 해도 된다고 주장해버리면, 간호사를 비롯한 여타 다른 보건의료 직역이 직접 초음파를 하면 안 된다는 내용도 없다. 이 때문에 보건의료 직역 누구나 초음파를 해도 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급여∙비급여 대상 아니란 건 '안전성∙효과성' 검증 안 됐단 의미
병의협은 대법원이 한의원에선 초음파 검사료가 국민건강보험법상 요양급여 및 법정 비급여 대상에 해당하지 않으나, 특정 진료방법이 요양급여 대상 등에 해당하는지와 그 진료방법이 의료법상 허용되는 의료행위에 해당하는지는 별개 문제이므로 국민건강보험법을 근거로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이 금지된다고 해석할 수 없다고 한 부분도 문제 삼았다.
병의협은 “환자에게 적용 가능한 특정한 진단 방법이나 치료법은 의학적 요구도와 비용효과성 등을 고려해 요양급여 대상이나 비급여 대상으로 나뉘는 것”이라며 “요양급여나 비급여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말은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안전성과 효과 등이 검증되지 않았단 말”이라고 했다.
이어 “대법원 판결대로라면 신의료기술에 등재되지 않아 요양급여나 비급여 대상이 되지 않는 의료기술이나 장비도 환자에게 돈만 받지 않으면 환자 진단이나 치료에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말이 된다”며 “이렇게 되면 무분별한 환자 유인 행위와 사이비 의료가 판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위해 우려 없다? 68회 검사에도 자궁내막암 놓친 것 자체가 '위해'
한방의료행위를 하며 진단의 보조 수단으로 초음파를 사용하는 것은 보건위생상 위해 우려가 있는 경우로 단정하기 어려우며, 한의사가 오진을 더 많이 한다는 통계적 근거가 없다고 한 데 대해서도 반박했다.
병의협은 “대법원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68회의 초음파 검사를 했음에도 환자의 자궁내막암 2기를 놓쳐 환자가 조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어 환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며 “이 사건 자체가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행위가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보건위생상 위해가 된단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의사가 오진을 더 많이 할 것이란 통계적 근거가 없는 것은, 지금까지 한의사의 초음파 검사가 불법이었으니 통계가 없는 게 당연하다”며 “이 사실을 내세우며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병의협은 또 대법원이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이 한의학적 의료행위의 원리에 입각한 행위와 무관한 것이 명백히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한 데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병의협은 “의학은 과학의 한 분야로서 과학기술에 기초한 의료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하지만 한의학은 과학의 발전과 무관하게 수백 년 전부터 전통의 한 부분으로 존재해왔고 근데에 이르기까지 거의 발전이 없었다. 이로 인해 현대의학과도 진단, 치료, 예방 등의 전 영역에서 엄청난 괴리가 있다”고 했다.
이어 “실례로 인체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인 해부학의 경우, 한의학에서 생각했던 인체 구조와 현대 의학이 밝혀낸 인체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며 “그런데 현대 의학의 해부학에 기초해 구조물을 평가하는 초음파 검사를 인체 구조를 전혀 다르게 배우는 한의사들이 사용하는 건 맞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한의사 의과 의료기기 사용 "억울한 피해자 쏟아지고 오진 피해자 구제 어려워질 것"
병의협은 이번 판결의 여파로 향후 한의사들이 대부분의 의과 의료기기를 사용하게 되면 무고한 피해자들이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병의협은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자 대한한의사협회에선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며 앞으로 CT, MRI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과 의료기기 이용을 할 것임을 공언했다”며 “만약 이번 판결이 한의사들의 의과 의료기기 사용의 시발점이 돼 실제로 한의사들이 광범위하게 의과 의료기기를 사용하고 혈액검사 등 진단검사도 하게 된다면, 2년 동안 진단이 지연돼 치료시기가 늦어진 이번 사건의 피해자와 같은 억울한 피해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보다 문제는 한의학이란 학문 자체가 매우 주관적 해석이 가능해 의학의 기준으로는 오진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라며 “합법적으로 의과 의료기기를 이용해 이를 한의학적으로 해석해 치료하다가도 오진을 범해도 처벌할 수 없게 돼 피해자 구제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병의협은 또 “이번 판결로 한의사뿐 아니라 다른 보건의료 직역들도 의료 영역을 넘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실제 대한간호사협회는 한의협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간호사들도 의사들 영역을 넘볼 것이라고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그동안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과 질을 유지해오던 보건의료인의 면허 및 자격시스템의 혼란을 유발해 의료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했다.
시행규칙 마련 및 의료법 개정 등 현실적 대응책 필요
병의협은 끝으로 향후 파기환송심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취지를 부정하기 어려운 만큼 현재로선 현실적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병의협은 “대법원은 한의사의 의과 의료기기 전체에 대한 사용을 허용한 게 아니라 진단용 초음파처럼 특정 요건을 갖춘 검사에만 사용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해 준 것”이라며 “혼란을 막기 위해 복지부는 전문성이 담보될 수 있는 범위로 개별 의과 의료장비의 운용 및 자격에 대한 자세한 기준을 마련해 시행규칙으로 발표해야 한다. 국회는 대법원에서 지적했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한 의료법 개정을 통해 의료인들이 자신들의 면허된 행위 이외엔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한의협은 이번 대법원 판결이 전체 의과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한 것인 양 여론을 호도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아직 파기환송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한의사 회원들이 불법을 자행하도록 종용해선 안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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