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4.07.03 08:16최종 업데이트 24.07.0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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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의 어제, 오늘, 내일 : ‘비커 속의 개구리’, 판도라 상자는 열렸다.

[칼럼] 김한중 연세의대 명예교수

사진=챗GPT가 그려준 비커 속 끓는 개구리 

[메디게이트뉴스] 전공의들이 사직하고 병원을 떠날 때 발표한 7대 요구안의 첫 번째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정책과 필수 의료 정책 패키지 전면 철회'다. 의료계가 줄곧 요구했던 필수 의료 살리기 정책을 내놓았지만, 백지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재원 등의 구체성이 없어 실천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K-의료가 세계 최고라는 자랑 속에서 왜 젊은 후배들은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가 없다”고 했을까? 얽히고설킨 우리 의료 현실을 살펴보자. 50여 년 동안 닫혀있던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1. 적정 의사 수의 정답은 없다.

지금 의료 현장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면 의사 수가 부족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대학병원들조차 의사를 구하기 어렵고 인건비도 크게 올랐다. 의대 입학 열기는 더 심해졌고, 지역적 불균형도 경제학적으로는 부족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발단은 '의대 증원 2000명'이라는 숫자에 있다. 의료계는 이런 정책 결정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하고 정부는 그 근거가 차고 넘친다고 한다. 오랫동안 여러 곳에서 진행한 의사 수 추계를 보면, 큰 경향을 파악할 수 있어도 정확한 숫자는 의미가 없다. 우선 수요 추계에서 너무 많은 가정을 깔 수 밖에 없다. 가정의 타당성이 깨지면 예측 결과는 소용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인구수와 구조 변화, 기술의 발전을 예측하는 것은 오히려 편차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어떤 진료체계와 보상체계를 갖는지에 따라 필요한 의사 수는 5배 이상 차이 날 수도 있다. 진료량과 관련 없이 의사들이 고정된 수입을 갖는 영국 같은 나라는 가능한 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해서 전문의 진료를 보기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하고, 진료량에 따라 수입이 증가하는 미국,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려 한다. 바로 이 세 나라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비슷한 숫자로 최하위 그룹에 속하는 이유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전문의 진료가 당일에도 가능하다. 

서울 의대·병원 비대위가 의사 수 추계를 공모하는 과정에 국민들이 원하는 의료체계를 먼저 설정한다는 구상이 돋보인다. 동시에 어떤 방법으로 단시간에 이상적인 의료체계를 설정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의사 수 추계 과정에서 계량적 자료와 수식들이 사용돼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가정 설정 등에 연구자의 가치가 강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인 결과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의미에서 의사 수 추계에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 자문관 초청이 도움 되리라는 확신도 없다. 그들은 대부분 국가 주도의 평등주의적 규제 의료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가치가 우리와 다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2. 의사가 기피하는 것은 필수 의료가 아니라 불합리한 건보 의료다. 

‘필수 의료’란 용어가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무엇이 필수 의료인지 물으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어떤 때는 내·외·산·소 기본 4과를 말하지만 피·안·성으로 불리는 과들도 피부암, 시신경 손상, 화상 등 필수 의료로 볼 수 있는 질환들이 수없이 많다. 또 어떤 때는 응급실, 중환자실 같이 촌각을 다퉈 진료해야 하는 바이탈 과를  의미하기도 하고 심장 수술, 뇌수술, 광범위한 암 수술과 같이 고위험, 고난도 수술을 일컫기도 한다.

오히려 국제적으로는 예방 접종, 안전한 식수 관리, 감염병 관리 등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일차보건의료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필수의료를 진료과로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 우리 의료현실에서 필수 의료란 '전공과목을 선택할 때 기피하는 과'로 여겨진다. 수련은 한계에 부딪힐 정도로 고되고 힘든데 막상 수련이 끝나면 전공을 살려 갈 곳이 없다.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는 저 출산으로 대상 인구 자체가 대폭 줄어 기존에 배출된 전문의들도 전공 분야를 떠나는 상황이다. 응급실, 중환자실 진료 같은 바이탈 의료나 폐, 심장, 뇌종양 등 고위험 고난도 수술은 고가의 시설 장비와 숙련된 팀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원은 불가능하고 병원도 자신이 수련 받은 병원급이어야 한다. 비침습적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수술은 감소하는데 신규 전문의를 배출했다고 해서 마냥 스탭 수를 늘릴 수도 없다. 

그런데 기피 과들은 하나 같이 건강보험에서 급여하는 질병과 의료행위 중심으로 진료한다. 해당 의료행위가 의학적으로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가 급여 채택의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일단 보험 급여 진료로 결정되면 환자 진료 시 정부가 정한 수가를 포함한 모든 규제를 따라야 한다. 정부는 여러 과정의 심의를 거쳐 진료 수가가 정해졌다고 하지만, 정부의 뜻을 벗어나 결정된 사례가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 의사들은 두 가지 이유로 의사의 길을 선택한다. 첫째 환자를 살린다는 직업의 보람을 찾으려는 것이고, 둘째 경제적 안정이다. 새내기 의사들에게는 수가 통제를 받지 않고 의료사고 위험은 훨씬 낮으며 밤에 불려 나오지 않아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진료비를 임의로 정할 수 있고 진료비 전액을 본인 또는 실손 보험이 부담해서 건강 보험의 실사도 받지 않는다. 이른바,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길은 환자의 생명을 살린다는 아름다운 꿈을 갖고 진로를 선택했던 의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현실적인 유혹이 되기에 충분하다. 

3. 지역의료를 살리는 것은 취약 지역의 일차 보건의료이고 중증 응급환자 후송 체계 확립이다. 

과거 지역 의료정책은 취약 지역(무의촌)에 있는 보건소, 보건진료소, 보건의료원의 일차 의료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의사를 확보하기 위해 공중보건장학의, 전공의 기간 중 6개월 의무적 파견 등이 있었으나, 1980~1990년대 의사 수 급증에 따라 군의관 잉여 인력으로 공중보건의 제도를 만들었다. 공공보건의료 시설뿐 아니라 취약지에 있는 민간 병원까지도 공중보건의 인력 지원을 해왔다. 의대에 여학생 비율이 대폭 늘어나고 남학생들도 복무기간이 20개월이나 짧은 사병 복무를 선호하게 되면서 공보의 자원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지방의료원의 전문의 구인난 현상이 심해진 이유가 됐다. 

현 정부의 지역의료 강화는 비수도권 상급종합병원 강화책으로 보인다. 지역 균형 발전이란 차원에서 일리 있는 측면도 있지만 비수도권 대도시에는 의사도 병원도 이미 많다. 지역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각 지역마다 앞 다퉈 설립됐던 대학의 현실을 참고해야 한다. 지역 발전을 견인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지금은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다.

정부의 지역의료 정책이 성공하려면 과거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1989년 7월 1일, 의료보험이 전 국민에게 확대되면서 동시에 의료전달체계도 실시됐다. 모든 의료기관을 1,2,3차로 분류하고 전국을 소·중·대 진료권으로 나누어 적재적소에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도록 했고, 특히 전국을 8개 대진료권으로 나눠 모든 의료를 대진료권 내에서 해결할 수 있게 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 거점 병원에서 완결하는 의료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당시 의료기관의 지역별 불균형은 지금보다 더 심했고 모든 국민들은 최고의 병원, 최고 명의에게 진료받기를 원했다. 신문과 방송은 ‘빅5’의 명의들을 앞다퉈 소개했다. 그 결과, 도입 9년 만에 대진료권 구분은 사라졌고 1,2차 의료기관의 형식적인 진료 의뢰서만 가져오면 어느 상급의료기관에서나 진료 받을 수 있게 됐으며, KTX 개통으로 환자들의 수도권 쏠림은 더 심해졌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전국 어디서나 중증 응급환자를 골든타임에 적합한 의료기관에 후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국종 전 외상센터 교수가 아덴만이나 DMZ에 가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역과 전국권으로 상황통제 센터가 제대로 작동해 환자 상태에 따라 즉시 필요한 진료 가능 병원으로 후송하게 해야 한다. 이래야 응급실 뺑뺑이를 막을 수 있다.

4. 건강보험 정책이 개혁되지 않고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릴 수 없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국가의 경제 수준이나 국민의식, 의료자원을 볼 때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서구에서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발전해온 의료보장체계를 11년 만에 전 국민 의료보험으로 완성했다. 자랑이기도 하지만 무리도 많았다. 특히 모든 분야를 지배해온 관료주의는 보험제도 수립과 운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우선 모든 의료기관은 예외 없이 전 국민에 해당하는 건강보험 환자를 진료해야 한다. 모든 나라에서는 보험자와 의료기관의 계약으로 이뤄지는 것이 우리만 법률로 강제한 것이다. 조합 방식으로 운영되던 건강보험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결국 국가가 단일 보험자가 된 것이고 수요 독점(Monopsony)이란 힘이 실리면서 의사(의료공급자)는 법과 규정, 명령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 중 가장 예민한 것이 진료수가이다. 의료계는 수가 인상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고 정부는 필수의료를 중심으로 더 많이 보상하겠다고 발표했다. 보험료 인상 없이 필수 의료 수가를 올리는 것은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인 것이다. 수가를 올리려면 보험료도 올리고 또 병·의원 이용을 줄이기 위한 수요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솔직하게 알려야 한다. 국회 예산 정책처가 2023년 추계한 건강보험 재정 전망에 따르면, 올 해부터 적자가 나서 현재까지 25조원 정도 쌓여있는 누적 준비금이 2028년에는 전부 소진된다.

수가를 적정하게 올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취약한 보험 재정 때문이다. 최근 재정이 취약하게 된 배경에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와 실손 보험 대폭 확대가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보험료를 올릴 수도 없다. 이미 보험료는 법정 상한치에 근접해있고 특히, 퇴직자들의 보험료 부담은 우려할 수준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줄이는 수요 관리가 꼭 필요하다. 의사, 병원, 국민 모두 불필요한 의료 수요는 줄이고 필수의료에 대한 보상은 늘려 지속 가능한 건강 보험을 만들어야 한다.

5. 의료소송으로 심한 곤욕을 치룬 의사는 정상 복귀가 어렵다.

서울 한 대학병원에 있었던 신생아 사망사건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대법원에서 무죄로 최종 판결됐으나 의사 2명과 간호사 1명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최근에는 파킨슨병 환자에게 멕페란 주사를 처방한 의사는 항소심에서도 유죄가 선고되면서 의료사고에 대한 의사들의 우려는 더욱더 커지고 있다. 한 번이라도 의료소송의 호된 경험이 있는 의사는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손실로 정상 회복이 어렵기도 하다.

모든 직종에서 업무상 과실에 의한 상해나 사망이 발생한 경우 처벌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의사만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최고의 학술지 ‘랜싯(Lancet)’에 실린 우리나라 의료 위기 보고서의 2013년부터 5년간 우리나라에서 의료사고 형사 기소 건수는 일본에 비해 15배이고 2020년에는 영국보다 566배나 높아 충격적이다. 정부도 의료사고 형사처벌에 대해 같은 인식을 하고 있어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 추진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반대, 환자는 약자라는 사회 인식이 커서 특례법이 추진 될 수 있는지는 지켜봐야 한다.

형사처벌 못지않게 민사상 피해 보상액도 대폭 증가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형사처벌에 대해서는 전향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두텁게 하겠다고 했다. 이런 보상액 증가는 그대로 의료비 상승의 주원인이 된다. 미국에서 의사들의 의료사고 보험료는 웬만한 사람의 연봉을 넘어서고 그대로 보험 보상 범위에 포함된다. 또 이런 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의사는 방어 진료를 하게 된다.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검사를 모두 하게 된다. 약자인 환자를 도와야 한다는 사회 인식이 사회 전체에 큰 짐을 지우는 것이다.

6. 한국 의료의 주춧돌 대학병원, 붕괴가 시작된다.

의료시스템의 결과를 평가하는 접근성, 질, 비용 면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이다. 특히 병원 부문에서 단기간 동안 쌓아온 업적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미국 뉴스위크지는 매년 세계 최고 병원 250개를 선정한다. 8만5000명의 세계 의료전문가 설문 조사, 입원 경험이 있는 환자 만족도 조사, 연구·교육·환자 안전 등에 관한 병원 자료를 종합해서 평가한다. 세계 병원이 100만 개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250위 안에 드는 우리나라 병원이 2024년에는 17개였다. 순위 안 과반이 미국 병원이고 우리나라 순위는 매년 3~4위였다.

17개 중 서울대병원 2개를 제외하면 모두 사립대학교 부속 병원이다. 낮은 보험수가 등 척박한 의료 환경 속에서 설립 비용이나 운영비용 모두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립대학 병원들의 성과는 놀랍다. 이 성취는 교수,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진들의 몰입과 헌신의 결과이다. 교수들의 근무 강도도 전공의 못지않게 고되다. 환자 진료 외에도 학생 교육, 학회 활동 특히 승진과 직결되는 연구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는 교수직 선호가 줄어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교수들의 열정과 헌신은 ‘착취 사슬의 중간자’ 역할을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소속 학교·병원에 대한 주인 의식이 어느 직업인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응급실 뺑뺑이, 긴 대기와 짧은 진료 시간 등으로 여러 문제가 생겨나지만, 우리나라 의료체계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은 ‘대학 병원’이다. 전체 의사의 약 10% 정도의 전공의가 의료 현장을 떠나 겪고 있는 현 의료사태를 보아도 병원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병원은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와 같다.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떠나도 병원은 멈춰 선다. 철저한 분업으로 모든 직종이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의사는 팀의 주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대학병원들의 영광 그늘에는 의료진의 희생이 있었다. 특히 전공의들의 업무강도는 어느 근로자보다 쎗고 수련 환경은 열악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전공의들부터 자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변화의 충격에 견디지 못하면 대학 병원은 무너지고 우리 의료도 붕괴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짚어봐야 할 것이 공공 병원과 민간 병원 간의 잘못된 인식이다. 일부에서 ‘공공’은 ‘선’으로 ‘민간’은 ‘악’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 공공의대 설립과 공공의료 확대가 의료 현안을 해결해 줄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개설하는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 보험 당연 지정제에 따라 공·사립에 관계없이 같은 진료 수가를 받아야 하고 같은 규제를 받으며 코로나 유행 같은 비상 상황에서도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사적 재화로 공공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설립 구분과 재정 악화 시 공공은 정부 또는 자치단체가 지원하고 민간은 문을 닫아야 한다. 중·고등학교 평준화 이후 특목고, 자사고를 제외하면 공·사립 구분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민간 병원은 더 치열하게 진료해야 한다. 왜 진주 의료원이 폐쇄됐고 3800억 원이 투입된 성남의료원은 아직도 운영 정상화가 되지 않는지를 곱씹어봐야 한다. 국가가 교육과 의료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을 때 육영사업이라는 미명으로 민간 투자를 유도했다. 지금 민간 의료를 비판하는 것은 토사구팽과 다를 바가 없다.

7. ‘비커 속 개구리’, 한국 의료의 미래가 보인다.

우리나라 보험수가를 보면 진료 항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다. 보험 도입 당시는 관행수가의 60~70%, 현재도 원가를 밑도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젊은 의사들이 우리나라 미래 의료에 대해 절망하는 이유는 건강 보험 도입 이후 거의 50년 가까이 전개돼 온 의료 상황이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서 죽어가는 ‘비커 속 개구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시 초기에는 500명 이상의 상용 근로자를 시작으로 서서히 가입자를 확대했기 때문에 원가 이하의 수가에도 일반 환자를 진료하며 적응할 수 있었다.

보험환자가 증가하면서 다른 적응 방법을 찾았다. 법이 인정하는 비급여 의료 행위에 일반 수가를 적용해 보험 진료로 인한 손실을 메꿔왔다. 특진비(지정 진료비), 병실 차액, 신의료기술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이에 맞춰 개발된 실손 보험이 본인 부담을 크게 완화해서 의사도 환자도 큰 부담 없이 비급여 의료를 증가시켰다. 그러다가 과거 정부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지정 진료비, 2인실 병실까지 보험이 적용되고, MRI, CT, 초음파까지 점차 확대되면서 소위 필수 의료 중심인 대학 병원의 비급여 진료는 로봇 수술과 종합 건진 정도만이 남았다. 날로 커지는 실손 보험 보상은 피·안·성·정 등 개원가로 집중됐다.

또 하나의 생존 방법은 ‘박리다매’라 불리는 진료량을 늘리는 것이다. 경제 이론을 빌려오면, 공급량을 늘리면 한계 수익과 한계 비용이 함께 감소하고 그 둘이 만나는 점에서 가격과 공급량이 결정된다. 그러나 현 보험 수가 체계에서는 가격이 고정돼 있어 한계 수익은 공급량과 관계없이 일정하다. 그래서 진료량을 늘릴수록 이익이 커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수, 전공의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 강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일해도 비급여 항목이 줄어들면서 병원의 수익성은 악화됐다. 특히 소아과, 내과, 가정의학과 등 검사나 영상 촬영, 시술이 적은 과들은 병원에서조차 필요 자원에 대한 지원 요청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정부가 필수 의료 정책 패키지에서 밝힌 혼합진료 금지 등은 앞서 말한 적응 수단을 잃게 할 수도 있다. 2002년에 의료기관 건강보험 당연 지정제에 대한 헌법 소원 관련 판결이 있었다. 위헌이라는 두 재판관의 소수의견도 있었으나 합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합헌 판결의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비급여를 통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이런 여지가 없어지면 급여 서비스 진료량을 더욱 늘려야 한다. 그리고 고스란히 의료진의 업무량 증가로 이어진다.

규제 중심의 정책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새로운 규제를 만든다. 젊은 의사들은 추가 되는 규제 속의 의료, 비유하자면 정부가 만들어대는 ‘가두리 양식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규제에 적응하기 위한 편법도 거부한다. 전문인의 정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원한다. 그리고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한 환자를 살리는 일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기 원한다.

맺는말: 겉으로는 화려한 한국의료, 속으로는 아프다. 

한국 의료는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많은 문제가 누적돼 왔다. 너무 엉켜서 풀 수 없는 실타래와 같다. 조급한 마음에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내어 다시 이으면 매듭이 여러 개 생겨 쓸 수 없게 된다. 시간이 걸려도 참아가며 엉킨 실을 차근차근 풀어야 한다.

최근 응급의학과 젊은 의사 54인이 쓴 ‘응급실 우리들의 24시간’이란 책을 읽었다. 웃게 하는 글도, 울리는 글도 있었다. 삶의 현장에서 꼭 필요한 곳을 지켰다는 자부심과 떠난 후 허전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응급의학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격랑의 시기가 지나가면 평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고 의대생들이 학교를 떠나 병원과 한국 의료를 무너뜨릴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재건할 수는 없다. 모든 당사자들이 함께 인내하면서 문제를 풀고 자랑스러운 한국 의료가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겉으로 화려한 한국의료가 속으로 아프다는 자각에서 문제를 풀기 시작해야 한다. 가장 큰 희생자였던 젊은 의사들도 우리나라에 남아 의업을 이어가기를 원하면 한국 의료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해주길 바란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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