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보다 감정이 앞서는 탈 진실(Post-truth)의 시대, 전문가들은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
위험소통(Risk Communication), 시민사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신뢰 쌓아야
▲위험통제학회 신동천 회장 발표자료.
[메디게이트뉴스 임솔 기자] 전문가들에게 2008년 광우병 파동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대중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이라는 각인을 막을 수 없었다. 원자력발전소 설치를 늘리는 것 역시 실제적인 위험보다는 대중의 공포심이 앞섰다. 메르스 등 감염병이 전파되면 대중은 실제 그 위험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회 현상을 두고 '탈 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진실이 가진 힘으로 설득해도 감정이나 주관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각종 위험 소통(Risk Communication)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위험은 물론 아직 닥치지 않은 위험에 대해 자꾸 꺼내고 말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정부와 전문가들이 시민사회와 신뢰를 쌓아야 한다. 한국위험통제학회는 22일 ‘효과적인 리스크 거버넌스를 위한 과학기술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열린 다산컨퍼런스에서 이 같은 내용을 논의했다.
진실 그 이상의 시대, 신뢰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국위험통제학회 신동천 회장
선진국들은 위험을 통제하려 들수록 더 통제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단계의 위험소통조차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다.
한국위험통제학회 신동천 회장(연세의대 예방의학과 교수)은 "위험(risk)은 잘 모르고 있다가 어떤 사건이 있으면 갑자기 그 수치가 올라간다. 매일 같이 화학물질과 발암물질이 쏟아지고 있다. 어떤 위험이 생기면 이에 따른 면역력이 생겨서 사회적인 혼란이 적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혀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그만큼 우리는 위험에 대해 전혀 연구하지 않았다. 시민 활동이나 정치활동도 아직 부족하다”라고 지적했다.
신 회장은 "위험 소통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불확실성, 제한점 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알리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라며 “위험에 대한 유해성과 노출을 비롯해 사회 경제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로부터 위험 요소를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신 회장은 “현대 사회에서 위험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시민사회가 먼저 특정 위험을 어떻게 느끼는지 논의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라며 "특정 문제의 위험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것과 무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위험에 대한 감정부터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책 결정자와 시민사회의 신뢰 구축이다. 신 회장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과학의 한계점을 벗어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라며 "이를 위해 긴 시간에 걸쳐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밝혔다.
신 회장은 “위험요소가 담긴 어떤 사안을 결정하려면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필요하다. 개인의 참여가 중요하다. 그 다음 평가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라며 “과학 자체가 아닌 반대적인 측면에서의 과학도 발전해야 한다. 과학적인 설명에 벗어나 합리적인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진실을 넘어선 위험소통을 통한 의사 결정 과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16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가장 많이 썼던 의미 있는 단어는 탈 진실(Post-truth)이었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객관적인 사실보다 사람들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신념에 따른 호소가 대중 여론 형성에 훨씬 더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정부가 위험소통에 나서지 않으면 정책을 세우거나 계획을 세울 때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위험에 대한 문맹을 탈출해야 한다”라고 했다. 신 회장은 “신뢰는 쉽게 얻을 수 없다. 매년 신뢰를 구축해 나가는 프로그램을 만고 한단계씩 쌓아야 한다"라며 "우리나라도 신뢰를 통해 위험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문화가 가능하길 바란다”고 했다.
안전은 안심할 수 없다, 사고 예방 시스템 마련해야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문일 교수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문일 교수는 "화학사고는 사고 당시도 굉장히 위험하지만 사고가 난 다음에도 영향이 매우 오래간다”라며 “일반적인 다른 사고들과 다르다. 각종 재해라면 태풍이 지나가고 화재가 진압되면 끝나지만 화학사고는 그렇지 않다. 이에 따른 시스템 마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2년 구미 불산 가스 누출사고를 예로 들면 모든 부처, 모든 기업의 문제가 됐다. 문 교수는 “당시만 해도 화학사고와 관련한 조직이 없었다. 구미 사건 이후 이제는 환경부, 고용노동부, 소방청 등 함께 대책을 세우고 국가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바뀌었다”라며 “소방청은 각종 사건이 있을 때 6개 권역으로 나눠서 훨씬 빨리 움직인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도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기술의 변화가 너무 빨리 바뀐다. 이런 복잡한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리스크 문맹을 탈출할 수 있다”라며 “하지만 만병통치 처방은 없다. 위험소통을 통해 어떤 맥락에서 무슨 주제를 갖고 논의할지 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 교수는 “몇년 전 인천시에 대형 공장이 들어선다고 할 때 시민들이 반대했다. 인천시민이 죽어간다고 했다"라며 "이런 여론은 기술만으로 풀리는 일이 아니다. 신뢰를 쌓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문 교수는 “현재는 공장이 설립될 때 노동부, 환경부, 국토교통부, 소방청 등 관련 부처의 규제가 많아서 관리가 적절히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필요한 규제가 빠져나가는 측면이 있다"라고 했다. 이어 "지자체에서 아파트와 병원 등을 허가하다 보니 관련 법이 미비한 측면이 있다. 가령 새로 아파트가 들어설 때 환경이나 안전 영향평가가 있어야 한다”라며 "필요한 규제를 정교하게 짜고 위험을 관리할 것"을 주문했다.
문 교수는 “신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노력해야 한다. 안전을 안심하는 순간 망한다고 본다. 각종 사건사고 이후 정부도 새롭게 바뀌고 재도약을 해야 한다"라며 "비슷한 사건이 났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시민들 스스로 위험 관리 고민하고 참여하는 문화 형성되길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는 "1990년대 국내에 있었던 대형 인재사고를 보면 짧은 기간동안 압축 성장을 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해석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열차 탈선 사고, 지하철 화재 사고 등 돌이켜 보면 정말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 교수는 “위험이 발생한 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위험을 관리하는 것을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라며 “비용을 줄이고 무엇인가를 빨리빨리 하려는데 급급했다. 안전에 대한 투자를 건너뛰고 성과에 급급하다 보니, 문제가 축적되다가 한꺼번에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어떻게 하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회적 수준에서 위험관리는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국민들은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위험에 대해 더 많은 감정이 쌓이고 토론을 하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 소통에 대한 문제 해결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교수는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이후에 통신안전망을 강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여전히 통화가 제대로 안 된다고 한다"라며 "이는 소통의 실패이자 위험 관리를 위한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는 규제해야 할 것은 규제하지 않고 규제하지 않아야 할 것은 규제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측면이 있다"라며 "짧은 시간에 압축성장을 했지만, 이를 이끌어갈 수 있는 도덕적인 자원은 매우 취약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한국의 건설기술력은 최고수준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같은 회사, 같은 기술인이 한국에서 건설하면 무너진다고 했다. 기술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을 활용해서 성과를 내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반성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에 대한 담론이나 대화를 거쳐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소통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기술적인 토론보다는 논리적인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개인이 겪는 위험을 사회화하고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라며 “혹시라도 평소에 귀찮을 수 있더라도 그 일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시민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위험 소통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 대중은 특정 정책에 대한 비난은 많이 하지만 정책에 참여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라며 "명망가에만 의존하는 문화를 개선하고 시민들 스스로 고민하고 토론하는 문화에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댓글보기(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