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서울특별시의사회가 의사가 처방하지 않은 의약품이 환자에게 조제되고도 환자와 처방의사에게 변경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이른바 ‘깜깜이 대체조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특히 환자와 의사가 실제 조제된 의약품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사실상 성분명처방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환자의 알 권리와 의약품 안전을 위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서울시의사회는 27일 은평밝은내과 조승철 원장이 진료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대체조제 관련 사례를 공개하고, 환자 고지 및 동의 절차 강화와 처방의사 사후통보 의무의 철저한 준수를 촉구했다.
서울시의사회는 현행 대체조제 제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문제로 처방의사가 환자의 실제 복용약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의사가 특정 의약품을 처방하더라도 약국에서 다른 제품으로 변경한 사실이 전달되지 않으면 이후 진료에서 환자의 복용약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환자 역시 처방의사가 약을 변경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 원장이 경험한 사례에서는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오랫동안 같은 의약품을 복용해 온 80세 남성 환자가 평소 먹던 약의 색깔과 모양이 달라졌다며 처방 변경 이유를 따졌다. 그러나 조 원장은 처방을 변경한 사실이 없었다.
조 원장이 처방한 의약품은 흰색의 ‘뉴부틴서방정’이었지만 환자가 약국에서 받아온 제품은 녹색과 흰색 계열의 ‘애니틴서방정’이었다. 두 제품은 모두 트리메부틴말레산염 300mg을 함유한 서방정으로 성분과 함량은 같지만 제품명과 외형이 다르다.
환자는 약국에서 변경 사실을 설명받지 못했다고 했으며, 조 원장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대체조제 사후통보 시스템을 조회한 결과 해당 처방기간의 통보 기록은 0건으로 나타났다.
다른 환자에게는 항혈소판제 ‘세레탈서방캡슐100mg’을 처방했으나 실제 환자의 약품 용기와 투약이력에는 ‘유레타졸서방캡슐100mg’이 기재돼 있었다. 두 제품은 실로스타졸 100mg을 함유한 서방캡슐이지만 외형과 식별표시가 달랐으며, 이 사례 역시 사후통보 전산 기록이 조회되지 않았다.
서울시의사회는 이 같은 사례들이 대체조제 자체의 허용 여부를 넘어 환자와 처방의사 모두 의약품 변경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환자가 기존 의약품과 다른 제품을 복용하면서도 변경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의료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이상 증상 발생 시에도 원인 파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조 원장을 찾은 환자 중에는 기존 약과 색깔이나 모양이 달라졌다고 불만을 제기하거나 변경된 약을 복용한 뒤 몸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고 호소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시의사회는 “의약품 변경 사실이 환자와 처방의사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면 의사가 처방한 제품과 환자가 실제 복용하는 제품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며 “처방전에 특정 제품명이 기재돼 있더라도 실제 조제 단계에서 다른 제품으로 변경되고 그 사실이 공유되지 않는 관행이 반복된다면 사실상 성분명처방과 유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의사회는 대체조제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성분명처방 의무화와 의약분업 제도 전반에 대한 재평가로 확대해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의 알 권리와 의약품 선택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분명처방까지 의무화된다면 처방과 조제 과정에서의 책임 소재가 더욱 불명확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서울시의사회 성분명처방대책위원회가 서울시 25개 자치구 의료기관 방문 환자 242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성분명처방 의무화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79.2%였다. 처방 의약품의 제품명을 알아야 안심할 수 있다는 응답은 87.6%, 대체조제 이후 부작용 발생 시 책임 소재를 우려한다는 응답은 92.3%로 나타났다.
황규석 회장은 “모든 의료정책은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며 “2000년 의약분업 시행 이후 누적된 국민 부담과 약제비 증가, 의료 이용 변화 등을 반영한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재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시의사회 성분명처방대책위원회 임현선 위원장은 “성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의약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며 “실제로 의사가 의약품을 처방할 때 제형과 첨가제, 체내 흡수 속도, 환자별 부작용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임 위원장은 “의약분업을 재검토하자는 것은 의사와 약사 간 직역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라며 “약국에 갈 때마다 약이 바뀐다면 환자들의 불안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무엇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와 국민을 위한 일인지 먼저 돌아보고 소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