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16.05.02 10:12최종 업데이트 16.05.1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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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데 가서 딴짓하는 의사, 강병철上

[인터뷰]캐나다 거주하는 의사 번역가

하루 300명 보던 의원을 때려 치우고 외국으로 나간 그의 사연?

'비임상 의사'와 '해외 이민 의사'라면 항상 안테나를 세우던 기자에게 두 가지를 모두 갖춘 흔치 않은 사례가 감지됐다.
 
현재 임상을 접은 채 캐나다에서 번역가로 활동하는 강병철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강씨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취득 후, 제주도에서 개원해 잘나가다 돌연 해외로 건너갔다.
 
하루 300명 가깝던 외래 환자를 포기하고, 낯선 환경에서 다른 일을 하는 그의 사연을 들어봤다.
 
(애당초 전화 인터뷰 예정이었으나, 그가 개인 사정으로 국내에 들어와 대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딴데 가서 딴짓하는 의사, 강병철上
딴데 가서 딴짓하는 의사, 강병철下


 
메디게이트뉴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선생님께 이걸 먼저 여쭤보고 싶어요.
 
선생님은 추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질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구체적인 계획이 아직 없으신가요?
 
-저의 꿈은 어디든 끝까지 돌아다니는 거에요.
 
힘이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메디게이트뉴스: 현재 선생님은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 거죠?
 
-현재 돈이 되는 일 한 가지와 돈이 잘 되지 않는 일 한 가지를 하고 있는데, 둘 다 번역입니다.
 
번역이 크게 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상업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출판 번역이에요.
 
서양이나 일본은 출판 번역만 해도 먹고 살지만, 국내에서는 그게 굉장히 힘듭니다.
 
예를 들어, 제가 300페이지를 석 달에 걸쳐 출판 번역을 하면, 손에 쥐는 돈이 고작 500 (만원) 정도에요.
 
상업 번역은 여러 매뉴얼이나 임상시험 프로토콜, 혹은 약품 정보 번역이라든지 논문 번역 같은 일입니다.
 
 
메디게이트뉴스: 출판 번역을 하시면서, 상업 번역을 틈틈이 하시는 건가요?
 
-그 반대입니다.
 
상업 번역이 먹고 사는 일이니깐, 그게 주고요, 짬짬이 출판 번역을 합니다. 
 
강병철 씨가 번역한 책들

잘나가던 제주도 개원의 시절
 
메디게이트뉴스: 의대는 어쩌다가 들어오시게 된 거에요?
 
-사실 저는 의대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문과였고요.
  
저는 법대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선 "편하고 잘사는 의사를 해라"고 권하셨지요.
 
저는 그게 싫어서 저항하다, 결국 부친의 의지를 꺾지 못해 의대에 들어갔지만, 정말 안 맞더라고요.
 
의대 들어가서 평생 에이 플러스를 맞은 과목이 딱 두 번이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저랑 비슷하시네요.(웃음)
 
-(웃음) 그게 예과 때 배운 사회학하고 한문이에요, 의대가 저랑 잘 안 맞았던 거죠.
 
예과 때는 사회학과 한완상 교수님(전 국무총리)을 찾아가 전과하겠다고 하고, 본과 때 다시 한 번 전과를 고려했는데 지금의 안사람이 말려서 포기했죠.
 
당시 안사람은 본과2학년 저는 본과1학년이었는데 CC였어요.
 
안사람이 "알았다. 자기가 알아서 다 할 테니 제발 의사 면허만 따라. 아깝지도 않냐?"라고 하더군요.
 
 
(의대 내에도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비슷한 스토리가 가끔 전해진다.)
 
 
그러다 본과 3학년 때 병원 실습을 해보니, 막상 환자 만나는 건 좋았습니다.
 
제가 의학 지식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만, 조금이라도 아는 지식을 환자나 가족에 설명해 드리면 되게 좋아하는 걸 보고, '의대도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다가 어느 순간에 전해질(electrolyte) 공부에 꽂혀서 그 분야 대가를 찾아가 "관련 책을 다 읽었고 이것을 평생에 걸쳐서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인턴 마치고 그 공부를 계속하려고 내과 갈랬더니, 성적이 안 돼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소아청소년과에서 전해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저랑 잘 맞았어요, 소아청소년과가.
 
 
메디게이트뉴스: 원래 아이들은 좋아하셨나요?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을 그전까진 좋아하지 않았어요, 시끄러운 걸 참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인턴 때 막상 소아청소년과를 돌아보니깐 너무나 잘 맞더라고요.
 
 
메디게이트뉴스 : 해외로 떠나기 전에 제주도에 개원하셨던데, 어떤 계기로 거기에 가시게 된 겁니까? 고향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인턴 때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는데, 그때 인상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전문의 따고, 제주도로 공보의 지원을 했죠.
 
공중보건의 가서 3년 제주도에서 삼박하게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와이프는 서귀포시 보건소에서 보건의로 근무했고요.
 
 
메디게이트뉴스 : 근데 어쩌다가 개원까지 하면서 눌러앉으신 거죠?
 
-원래 개원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병 때문에 쓰러지셔서 부모님 생계도 책임져야 하고, 동생들 시집장가도 보내야 하는 입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돈이 너무 필요한데, 펠로우로 다시 병원에 가면 무급이었거든요.
 
결혼하고 나서도 안사람이 동생 학비 등을 서포트했는데, 몇 년 더 고생하라는 얘기를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3년 살다 보니, 제주도가 자연도 기가 막히고 깨끗하고,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 제주도와는 정말 달랐으니깐요.
 
그때는 정말 꿈의 땅이었죠.
 
제주도 유채꽃

 
메디게이트뉴스: 펠로우로 돌아가시려다가 계획을 변경하신 것 같은데, 기다리시던 교수님들 반응은 어땠나요?
 
-저희 스승님이 전화하셨어요.
 
제 형편을 다 아시니깐, "너 (돈이) 얼마나 필요하냐? 내가 꿔줄 테니 올라와라"라고 하시더군요.
 
다른 교수님은 개원할 때 내려오셔서, "2년만 하고 급한 불 끄면 올라와라"고 하시고요.
 
 
메디게이트뉴스: 개원 수입은 괜찮으셨나요??
 
-제가 개원한 날 통장에 78만원이 있었고, 집도 없고 자동차는 프라이드 한 대, 그리고 병원밖엔 없는 거죠, 당시 상황이.
 
그런데 개원해서 난리가 났어요.
 
정말 환자를 많이 봤죠.
 
서귀포시 인구의 1%를 진료한 날도 있었고, 서귀포시 인구가 50000인데, 제가 500명을 봤으니…
 
개원하니 제가 꿈도 못 꾸던 돈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1년 매출이 꽤 됐으니깐요.
 
처음엔 돈 버는 재미가 대단했어요, 경이로웠죠.
 
제가 개원 때부터 전자챠트를 썼는데, 8년 반 간 개원을 마치며 통계를 확인해보니 하루 평균 280명을 봤더라고요.
 
 
(8년 반, 하루 평균 280명. 부러움 이상의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숫자다)
 
 
메디게이트뉴스: 개원 당시 '현재 삶'에 대한 다른 불만은 없으셨나요?
 
자기 시간 부족이라든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다든지, 아니면 임상 외에 다른 게 더 하고 싶다는 욕구라든지...
 
-저는 일단 가정적인 편이었어요.
 
병원 끝나면 애들과 집에서 놀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책보고 음악 듣는 것이다 보니, 집에 주로 있었습니다.
 
개원은 바빴지만, 돈 버는 재미가 있었고, 저는 평생 너무 가난해서 그 재미에 2~3년 했죠.
 
그런 건 있었어요. 개원하고 두 달쯤 지나니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계기
 
메디게이트뉴스: 이유가 뭐였을까요?
 
-난 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은데, 진료는 좀 단조로웠습니다.
 
봄에 개원했는데, 가을쯤 되니 이걸 10년만 하고 그만두자고 생각했죠.
 
 
메디게이트뉴스: 바짝 벌고 그만둘 생각이셨군요?
 
-네. 그래도 처음 2~3년은 버텼던 게, 돈 버는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의약분업 때문에 난리가 나서 의권쟁취 투쟁을 했어요.
 
당시 저는 지금 의사들이 말하는 소위 '사회주의 의사'여서, 삭발도 하고, '의쟁투'를 했는데, 그걸 하다 보니 의료계의 모순이 보였습니다.
 
제가 본 의료계는, 의사도 손해고 환자도 손해인 구조였습니다.
 
정부는 책임 있게 나서려는 의지도 없고, 너무 황당했습니다, 의료 판이라는 게…




 
그래서 7~8월쯤에 삭발하고 폐업투쟁을 했죠.
 
의원 문을 닫고 제주도를 떠나버렸습니다.
 
문을 닫고 "우리가 이기기 전까지는 절대 다시 문 열지 않는다"고 맘먹고, 마음 약해질까 봐 전국 유람을 떠났는데, 나중엔 지인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주위 의원 다 열고 너만 닫고 있다. 빨리 와서 열어라"고 말입니다.
 
그때 의료계를 달래려고 모종의 딜이 있었는지, 다시 의원을 여니 돈을 더 많이 벌게 됐습니다.
 
그전에도 많이 벌었는데, 매출이 더 늘었죠.
 
근데 차등수가제다 뭐다 다시 생기면서, 소득이 지속해서 천천히 줄더니, 결국 다 뺏어가더라고요.(웃음)
 
 
메디게이트뉴스: 외국에 나가서 살 생각은 언제부터 하신 거세요?
 
-몇 년을 미루다, 해외여행을 한 번 갔다 왔어요.
 
그 전까지 제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느냐면, "돈이 있으면 국내에 풀어야지 왜 외국에 풀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내 여행만 열심히 다녔는데, 더는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아버지가 "너도 그 정도 벌었으면 애미가 그렇게 바라는데 해외 한번 가봐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처음으로 간 게 영국이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그때가 언제죠?
 
-2002년이었습니다. 99년에 개원했으니 개원 3년째였죠.
 
당시 너무나 큰 문화적 충격이었고, 잊혀지지 않았던 순간이에요.
 
정말 제 인생을 바꿨으니깐요.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트라팔가 광장이라고 있습니다, 런던에.
 
여행 마지막 날에 거기에 앉아있는데 온갖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여행자들, 길거리 공연하는 사람, 한쪽에서 키스하는 연인들, 사진 찍는 관광객, 온갖 피부색의 인간들…
 
그 광경을 보는데, "이게 정말 자유구나! 근데 왜 우리는 아무도 이렇게 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못 산 게 후회되고, 이 광경이 아름답더라고요.
 
그래서 비행기 타고 오면서 안사람과 얘기했죠, "외국에서 좀 살아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개원도 잘되는 상황이라, 저희 안사람은 농담인 줄 알았죠.
 
 
메디게이트뉴스 : 영국을 다녀와서 그런 '병'에 걸렸는데도 개원을 꽤 유지하신 거거든요? 어떻게 참으셨나요??
 
-네. 맞아요
 
'외국병'이 굉장히 무섭거든요. 한번 들면 치유가 불가능하죠.
 
자꾸 저울질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쪽에서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게 있어서, 다 버리고 외국에 간다는 게 말이 안 될 수 있잖아요?
 
저는 조기 은퇴계획이 있어서 그때부터 재정계획을 세워서 저축도 엄청나게 한 상태였습니다.
 
저나 와이프나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소비를 줄이는 데 어려워하지 않았고요.
 
당시 승용차도 '아반떼'였으니, 사람들이 욕했죠.
 
 
그런데 영국 다녀와서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거에요.
 
하지만 외국에서 살려면, 애가 셋인데 함부로 결정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영국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거였어요.
 
4억이든 5억이든 그거 까먹을 때까지 2년이든 3년이든 있어 보자.
 
그러다 나중에는 애들 교육시키려면 대학까지는 외국에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도 그 사회에서 뿌리를 박고 유럽이란 사회를 정말 제대로 알고 싶다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메디게이트뉴스: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신 거죠?
 
-IELTS(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 System)라는 영연방 영어 자격 시험을 통과하고, 2005년 12월에 영국의 소아과 전문의 중 Basic Specialist라는 걸 땄어요.
 
이 자격증은 저의 아카데믹 스킬은 인정하고, 레지던트 3년차에 해당하는 수련 과정 2년만 마치면 전문의를 주겠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당시 소아 신장(Pediatric nephrology)에 관한 경력과 전공의 때 썼던 SCI논문도 있어서, 3명의 레퍼런스(추천인)만 더 대라고 하더군요.
 
근데 당시 제 은사님이 세계신장학회 회장이셨거든요?
 
그분이 "이 사람은 정말 내가 같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운명이 엇갈려서 일을 못했다. 이 사람은 어디를 가든 제 몫을 할 사람이다"라는 추천서를 써주셨고요, 나머지 두 은사님은 영국에서 수련경험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보장해주셨죠.
 
제 경력을 정리해서 보니 제가 봐도 뭔가 그럴싸하게 굉장한 사람 같았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그러면 당시 영국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였나요? 당시 못 가셨던 이유가??
 
-당시 서류를 주고 받으면서 친해진 영국 학회 직원이 이런 이메일로 제게 충고하더라고요.
 
"당신이 이런 자격을 얻었다고, 절대 (영국의사가) 다 됐다고 생각하지 말라"
 
영국은 모든 의사가 국가와 계약을 맺는 공공의료지만, 구직은 개인이 각자 병원을 알아봐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자격만 된다고 모두가 취직이 되는 건 아닌거죠.
 
그래서 인도나 파키스탄 의사와 달리, 일본이나 한국의사는 영국에서 찾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제가 개원 중이라, 인터뷰 보러 영국까지 자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준비는 하면서, 일단 아내와 애들을 싱가폴로 유학보냈죠.
 
당시 큰애가 왕따 문제로 학교에서 힘들어하고, 어차피 영국에서 갈 생각이라면 싱가폴에서 영어도 같이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메디게이트뉴스: 그러다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겁니까?
 
-그러던 중 제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당시 사고 소리가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그 충격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에어백이 터지고 안경은 날아가고 순간 "이제 엔진룸이 밀고 들어와 허리가 두동강 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 살아있었습니다.
 
차 밖으로 문을 열고 걸어나왔고, 무릎연골만 손상당했죠.
 
그런데 그 뒤로 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사고 당시 장면, 소리, 공포가 머리 속에서 끝없이 재현되는 겁니다.
 
6개월 정도 수면제를 먹으면서 심신은 망가지고, 아내가 걱정할까 봐 숨기다가 뒤늦게 말을 꺼냈더니 집안이 뒤집혔죠.
 
아내가 정리하고 싱가폴에서 바로 들어왔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당시 상황과 그 후 설명 좀 부탁합니다.
 
-젊었을 때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열망이나 한국 사회에 대한 염증, 다른 일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쉽게 결정 못 했을 거에요, 아이가 왕따를 당하지 않았으면…
 
"애가 여기에선 안되겠구나, 더 이상 학교를 여기서 다니게 하는 게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자"라는 생각이 굳어졌죠.
 
더 늦으면 아주 주저앉을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러다 마침 영국에서 인터뷰 제안이 왔는데, 와이프가 "몸도 안 좋은 주제에 수련을 또 하냐? 그냥 어디 가서 조금 쉽시다"라고 하는데, 쉬자는 얘기를 들으니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쉬자고 캐나다를 갔습니다.
 
2008년 3월에 갔는데, 당시엔 캐나다에서 2년을 쉬면서 영어도 늘면 영국으로 넘어갈 예정이었죠.
 
 
 
캐나다 적응기


 

메디게이트뉴스: 번역은 어떻게 시작하신 거세요?
 
-처음 4억의 이민자금을 준비해 까먹자고 생각했는데, 캐나다 가려고 했더니 누가 투자처를 소개해주더군요.
 
그래서 4억 중 일부를 투자하고, 와이프는 4억이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 불과 몇천만원 가지고 갔습니다.
 
 
밴쿠버란 도시에 갔는데, 생활비가 너무 비쌌습니다, 토론토보다 30%는 비싼 것 같아요.
 
물가는 비싸고 돈은 없고…
 
영국면허가 있으니, 영연방인 캐나다에서 진료할 수 있나를 좀 알아봤는데, 캐나다 면허를 다시 따라고 하더군요.
 
 
한 푼이라도 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한국 가서 다시 돈을 벌까도 생각했는데, 결국은 냉정하게 맘먹고 "번역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는 4권 정도 이미 번역서를 냈었고요, 캐나다에서 2년동안 체류하면서 번역할 책들을 이미 의뢰받아서 갔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그게 생계수단이 됐죠. 



2편에서는 '캐나다 생존기 및 의료'와 '번역'에 관한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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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환 기자 (dhkim@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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