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원 감정서는 병원 '무과실' 인정했는데 의료분쟁조정중재원 '3000만원 합의' 종용 왜?
산전관리·입원치료 등 과실 인정 어렵고 자궁파열·태아 사산 인과성 있다고 볼 수 없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의료사고감정단의 감정서 결과를 뒤집고 의료과실을 판결한 사건이 의료계 내 공분을 사고 있다.
1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A병원은 최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으로부터 응급제왕절개술 이후 태아가 사산한 사건에 대해 초기 진단 과정에서 의료인 측 과실이 있다는 이유로 3000만원 '합의권고'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메디게이트뉴스가 입수한 이번 사건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산하 의료사고감정단이 내놓은 감정서엔 판결 내용과 정반대로 'A병원의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의료사고감정단은 의료인, 법조인, 환자·소비자 등으로 구성된다. 감정단 감정 결과는 주로 민사상 분쟁 해결에 활용된다.
감정서에 따르면, 환자 B씨는 2020년 복강경 자궁근종절제술을 받은 이력이 있으며 2021년 A병원에 내원해 임신낭이 확안돼 6개월 가량 산전관리를 받았다.
B씨는 A병원에 입원한 동안 왼쪽 아랫배 통증으로 자궁수축억제제를 투여 받았고 유트로게스탄질좌정제 처방 이후 퇴원했다. 그러나 이후 복부 통증이 심해지자 대학병원 응급실에 내원했고 초음파 상 태아심음이 확인 되지 않아 응급제왕절개술을 했지만 자궁파열로 인해 태아가 사산됐다.
해당 사건에 대해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조정부는 "A병원은 자궁근종술을 시행한 이력이 있는 환자 B씨에 대한 진료를 소홀히 했다"며 "자궁근종술을 시행한 이력이 있는 경우 그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궁파열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해야 하나 병원은 설명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감정서는 A병원의 부적절한 의료행위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산하 의료사고감정단 A병원 관련 감정서 내용 일부 발췌.
반면 이번 사건 감정단 감정서는 ▲산전관리의 적절성(입원치료 및 퇴원의 적절성) ▲경과관찰의 적절성 ▲자궁파열 및 태아 사산의 인과성 등을 조사했고 모두 A병원의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반면 설명의무 위반을 지적한 대목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감정서는 "전자태아감시에서 자궁수축이 없는 것을 보아 병원 퇴원 과정에서 A병원이 임상적 실천수준에서 의미있는 부적절한 의료행위를 했다는 진료기록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자궁 경부의 변화가 있기 전에 가진통과 진성 진통을 일찍 구별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자궁수축은 불규칙하고 리듬이 없으나 통증을 수반할 수도 있어 조기진통의 진단에 있어 상당한 혼란을 준다. 경과관찰 과정에서 A병원의 의미있는 부적절한 의료행위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또한 감정서는 "환자 B씨 자궁파열 원인은 자궁근종절제술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자태아감시에서 자궁수축이 관찰되지 않았으며 자궁파열은 발생하기 전까지는 발견하기도 예방하기도 어렵다"며 "또한 만삭이 되기 전이라 자궁파열의 가능성만으로 미리 제왕절개술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며 병원 측 과실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임신 초기 유산은 염색체 이상일 가능성이 크며 임신 초기 유산에서 A병원의 의료행위와의 임상적 실천수준에서 의미 있는 인과관계를 제출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의료계는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한 상태다.
의료감정 결과와 조정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나올 뿐 아니라, 의료분쟁을 합의 위주로 유도하다 보니 의료감정 결과 의료적 과실이 없더라도 합의가 종용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서울의대 유성호 법의학교실 교수(대한의학회 법제이사)는 최근 의학회 E-뉴스레터 11월호에서 "최근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의료분쟁 재판에서 의료 측이 불합리한 결과를 받았다는 불신이 존재한다"며 "일부 의사들은 감정이 비전문가의 판단에 의해 왜곡되거나, 법원이 감정서를 형식적으로만 수용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불신은 의료감정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요인이며, 의료인들이 제도에 협조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1일 정책제안서에서 "현재 체계에서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감정인에 따라 상반된 의견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앞서 횡격막 탈장 환아 사건에서 3차례나 실시된 진료기록 감정이 모두 결론이 달랐던 사례가 그 단적인 예"라며 "감정 결과의 일관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 현실은 감정제도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병의협은 "일관성 결여의 원인으로는 표준화된 감정 지침의 부재, 감정인의 주관적 판단 편차, 단일 감정인에 의존하는 구조 등이 지적된다. 감정인 및 절차의 공정성 확보 부족도 큰 문제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원 및 수사기관이 의뢰하는 의료감정은 사건마다 임의로 선정된 전문가에 의해 이뤄지는데, 특정 기관이나 전문가에게 감정이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안으로 병의협은 "정부 산하에 (가칭)국립의료감정원을 설치해 의료사고 감정을 전담·관리하게 해야 한다. 이 기구는 의료계·법조계·중립성 있는 대표가 참여하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합의제 조직으로 구성하고, 전국의 사건에 대해 일원화된 감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며 "의료감정의 기준과 절차를 표준화해야 한다. 복수 전문가에 의한 교차감정, 필요시 부검·현장조사 등 종합적 사실규명 절차도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