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살다 살다 국가에서 꼭 필요한 필수 의료를 살리는 정책이랍시고 '낙수효과'를 들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낙수효과란 것은 컵을 피라미드처럼 층층히 쌓아 놓고 맨 꼭대기의 컵에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부터 물이 가득 차 넘쳐 흐르면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개선될 여지 없는 저수가와 삭감의 덫을 피해 의사들이 비필수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니, 의사 수를 늘려서 비필수 시장이 넘쳐 흐르면 경쟁에 밀린 의사들이 필수과로도 흘러 들어갈 것이라 논리다.
애초에 의료를 어떤건 필수 의료이고 어떤건 비필수 의료라고 구분짓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지만, 사람을 살리는데 반드시 필요해서 '필수 의료'라고 부른다. 그걸 살리는 방법이 비필수 의료를 먼저 채운 다음 경쟁에 밀려 흘러나온 낙숫물로 채우겠다는 발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는 국가가 지금 이 시간에도 생명을 살린다는 자부심을 갖고 묵묵히 필수 의료에 매진하고 있는 수만명의 의사들을 졸지에 경쟁에서 밀린 낙수과 전문의로 평가절하한 것이고, 이들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환호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이 사회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심지어 변호사와 비교하는 언론도 있었다. 변호사를 늘리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변호사들의 소득이 줄어들었고, 국민들이 법률서비스를 이용하기는 더 좋아졌다고 한다. 2012년 변호사 1인당 매출이 2억 4886만원이었는데 변호사 수를 2배로 늘리고 2021년 2억 4632만원으로 떨어졌으니, 의사들의 수입도 그렇게 떨어뜨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변호사가 2억원 넘게 버는 것이 배가 아파 변호사 수를 2배로 늘렸더니 변호사 수입이 겨우 254만원이 줄었다는 말이다. 기껏 254만원을 줄이려고 법률 시장 규모는 2012년 3조 6096억원에서 2021년 7조 7051억원으로 커졌다고 한다.
의사 수가 늘어나 서로 경쟁하며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는 논리는 애초에 비급여 시장을 제외한 의료 수가는 국가에서 정하는 것이지, 의사들끼리 경쟁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료 시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무지한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수가를 자랑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더 떨어질 곳도 없다. 이 때문에 경쟁에 의해 수임료가 정해지는 변호사들의 수입이 고작 254만원 감소했는데 국가가 가격을 정해주는 의료 시장에서는 그만큼의 효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법률서비스에 의한 접근성이 높아져 국민들이 보다 더 쉽게 법률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주장 또한 허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법률 시장 규모가 커지며 공급에 의한 수요 창출로 이전에는 법정 싸움까지 치닫지 않았던 불필요한 고소와 소송이 남발하는 사회가 됐고 국민들의 삶은 오히려 더 팍팍해졌을 뿐이다.
이를 의료계에 적용시켜 본다면 의사 수 증가로 의료 시장 규모가 커지며 공급에 의한 수요 창출로 그만큼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건보료 또한 늘어날 것이다. 이는 곧 그만큼의 세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 부담금이 저렴하니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는 일이 많아질 것이고 이는 곧 불필요한 검사와 처방의 증가로 이어진다. 국민들이 수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보료 부담만 커질 것이라는걸 변호사 수를 늘린 사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적자로 돌아선 건보 재정은 향후 고령화사회 진입으로 안 그래도 빠른 고갈이 예상된다. 여기에 의사 수 증가로 여기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건보료를 빠르게 고갈시키는 것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의료 서비스의 질과 접근성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의료체계를 빠르게 무너뜨리겠다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필수과 기피현상은 세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고질적인 저수가, 사법부의 과도한 판결, 그리고 실손보험 도입으로 인한 비급여 시장의 급격한 성장이 그 원인이다.
이 세 가지 중 낙수 효과에서 기대하는 것이 바로 비급여 시장을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다. 어느 세월에 의사 수를 대체 얼만큼 늘려야 비급여 시장이 넘쳐흘러 필수과에도 사람이 채워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문제의 핵심 중의 하나인 비급여 시장을 키운 범인은 바로 의사들이 아닌 정부다.
보험이란 것은 중증 질환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실손 보험을 도입해 의료기관 자유이용권으로 만들어 굳이 병원에 올 필요 없는 가벼운 질환에도 누구든 저렴하게 병원에 올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정부였다.
의사들은 단 한번도 실손보험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고, 오히려 실손보험 도입 당시 건강보험 재정을 소진시키고 건강보험체계를 무너뜨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지금 현실을 보면 가벼운 증상에도 동네 미용실 금액보다도 훨씬 저렴한 본인부담금에 실손 보험 보장까지 더해져 사람들이 병원을 마치 쇼핑하듯 이용하고 있고, 응급한 증상이 아님에도 응급실에 와서 응급실은 항상 사람이 터져나가고 경환들에 묶여 정작 중환을 볼 수가 없는 것이 딱 의사들의 말대로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응급실 뺑뺑이라며 의사 수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의사에게만 돌리고 있다.
정부가 낙수 효과를 기대한다는 말은 곧 의사들에게 잔이 채워져서 넘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채워지지 않은 비급여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걸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전공의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비급여 시장에 뛰어들라고 말했더니,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면서 비난하고 있다.
시스템에서 돈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정부 정책이다. 의사들은 흐름을 따라가는 것 뿐이다. 불필요한 실손 보험을 도입해서 그 쪽으로 돈이 흘러가도록 설계한 것도 정부였고, 필수 의료를 외면하고 그 효용 가치도 과학적 근거도 불분명한 한방에 돈을 쏟아 부은 것도 정부 정책이었다. 그렇게 정부의 외면을 받고 필수과가 무너진 것이 20년도 넘었다. 2000년도 초반부터 외과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산부인과, 소아과가 그 뒤를 따라서 이미 무너지고 있다. 험난한 수련과정을 거치고 필수과를 개원해 십여년을 살아오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간판을 내릴 때, 수십년간 진료해 오던 진료과목을 포기하고 비급여 시장으로 내몰린 의사들이 과연 돈 벌 생각에 신나서 간판을 떼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을 살리는데 반드시 필요해서 '필수' 의료라고 한다면 왜 필수 의료의 잔이 채워지지 않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순리건만, 어떻게 비필수의료 잔부터 채워서 낙수 효과로 필수의료를 채우겠다는 걸 정부 정책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가? 국회의원들은 의과대학을 본인 지역구에 유치했다고 생색내며 한 표라도 더 얻는 것에 혈안이 돼있고, 국민들은 의사 수입도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다며 환호하고 있는데, 왜 의사들은 알빠노하면 안 되고 잔이 채워지기 전에 비급여 시장에 뛰어들면 안되는가?
사람을 살린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틴 수만명의 필수과 의사들을 하루아침에 경쟁에서 도태된 '낙수의사'로 만들어 모멸감을 안겨주는 이 사회에 더는 무엇을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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