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경영학에서 리크루트먼트 패러독스(Recruitment Paradox) 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자면 ‘채용(採用)의 역설’ 정도 되는데, 어떤 기업이나 조직에서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여 매출이나 성과를 증대시키도록 꾀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좋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예컨대 어느 기업에 영업부서가 있다면, 그 조직의 최대 목표는 매출의 증대이다. 매출을 늘리려면 사원들의 생산성을 높이거나, 사원의 수를 늘리는 방법이 있다. 기존 사원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게 이상적이긴 하지만, 그건 분명히 한계가 있는 일이다. 따라서 새로운 인력을 채용해서 매출의 증대를 꾀하기 마련인데, 생산량이 늘어나는 대신 평균적인 비용을 감소시켜 효율을 높이려는 것이고 그런 방식을 흔히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라고 부른다.
‘규모의 경제’가 성공하려면 필수적인 요소가 있으니, 그건 새로 투입되는 인력의 비용이 기존의 인건비보다 저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력직의 경우 생산성은 높을지 몰라도 인건비가 저렴하지 않아서, 높은 숙련도가 필요한 직종이 아니라면 대개는 권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에서는 임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신입 사원의 채용을 통해서 평균 인건비를 낮추고자 한다.
다만 신입 사원의 경우 업무를 배우고 익혀서 어느 정도 기업이 원하는 수준으로 생산성이 올라오려면 시일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동안 신입 사원을 교육시키는데 소정의 매몰비용(埋没費用, Sunk Cost)이 들어가므로, 작금 중소기업들이 호소하는 것처럼 가르쳐서 이제 써보나 싶을 때 퇴사하는 직원들이 많다면 실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경우 직원의 문제라고만 보기 어렵다. 신입 사원의 채용이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충분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을 경우, 기업(조직)의 목표와 개인이 목표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즉 열심히 일해도 충분한 급여나 승진 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조직에 있어 규모의 경제를 실천하는 부속품으로만 갈려나가길 원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신입 직원들이 조기에 퇴사를 한다면 기업 입장에선 매몰비용을 제대로 환수할 수 없으므로, 실패한 채용이 되는 것이다.
규모의 경제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병원들
우리나라 의료시장의 경영 목표를 정의한다면 한 마디로 ‘저비용 고효율’의 추구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하에서 국민건강보험의 저수가에 묶여 있기 때문에, 생산을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없고 따라서 가능한 한 매몰비용은 적게 들이면서 규모의 경제를 이뤄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가장 적합한 인력이 전공의들과 신규 간호사들이다.
지금 이른바 빅5 병원으로 대변되는 상급종합병원들은, 전공의라는 저비용 고효율의 인력이 없다면 유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근로자의 법정 근로시간인 주당 40시간의 두 배인 80시간 이상을 일하면서도, 급여는 전문의의 몇 분의 일밖에 받지 않는 전공의가 대형병원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특히 우리나라 전공의들은 우수한 인재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의대를 졸업하였으므로, 여타 분야에 비해서 매몰비용도 적은 편이니 기업(병원)의 입장에선 최상의 채용이 아닐 수 없다.
의과대학 교육비는 물론이고 수련비용까지 지원하는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은 물론이고, 가장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충실한 미국도 전공의 수련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우리와 의료제도가 가장 유사한 일본 역시 국가나 지자체에서 지원이 이뤄진다. 그러므로 우리 상급종합병원들은 국가에서 지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편법으로 운영해왔기에, 어느 샌가 전공의가 없으면 경영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간호 인력이 부족하다고 정부가 간호대학의 정원을 크게 늘려왔지만, 정작 일손은 더욱 부족해지는 역설을 가져왔다. 빅5 병원들은 비롯한 상급종합병원들은 계속 병상을 늘리고 외래 진료를 늘려온 결과, 그에 따른 간호 인력도 늘어났다. 하지만 간호사에 대한 처우는 별반 나아지지 않음으로써 간호대를 졸업하고 부푼 마음으로 입사했던 신규 간호사들이 몇 년 만에 번아웃(Burnout) 되어 사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렇다면 간호사도 충분한 대우를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규모의 경제를 실천하려면 기존 근무자들보다 저비용의 인력을 채용해야 하므로, 병원들이 바라는 건 신규 간호사들을 뽑아서 몇 년 잘 써먹는 것이다. 수도권의 대형 병원들은 채용 후 몇 달씩 입사 대기 중인 간호사들이 넘쳐나므로 별로 아쉬울 게 없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지방의 중소병원들인데, 지역에서 근무할 간호사 수급을 위해 지방 간호대 정원을 크게 늘려왔지만 정작 거기서 일하기 원하는 신규 간호사들은 거의 없다.
의료시장에 있어 채용의 역설
이쯤 되면 눈치를 챘겠지만, 지금 정부가 의대 정원을 무턱대고 늘려봐야 소위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건 이미 경제학적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어왔던 것이고, 다만 정부만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상급종합병원들이 미국 등 선진국들처럼 수련에 중점을 둔 전공의의 비율을 10% 내외로 유지하면서 전문의를 충분히 고용해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유익한 일이고, 그것을 병원들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건강보험제도 하에서는 병원이 곱게 망하라는 것밖에 안 되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로자 입장에선 몇 년 쓰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을 당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이미 채용의 역설을 증명하고 있는 간호사뿐만 아니라, 전공의들도 차츰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데(전임의나 교수들도), 더 이상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충분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으로 감내해왔다면, 지금은 그럴만한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많은 전공의들은 정부가 대형병원들의 규모의 경제를 돕기 위해, 의대 정원을 늘려서 전공의 숫자만 늘리려 한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대형병원들이 전문의를 채용하여 의료서비스를 제고할 수 있도록 재원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돈을 안 쓰는 대신 저비용 고효율의 부속품만 늘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비단 의료시장뿐만 아니라,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도 대학 교육을 마치고 직장에 첫발을 들여놓은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기업의 채산성이나 조직의 효율만을 위해서 갈려나가는 소모품처럼 취급을 당한다면, 그런 직업이나 직장에 애착을 갖고 인생을 바치려는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며, 요즘 같은 MZ 세대들에겐 더욱 그렇다.
의료도 하나의 직업이고 개인의 생계와 자아를 실현하는 장소일 뿐이다. 더 이상 국민의 건강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의 아들딸들이 갈려나가는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국민 건강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이루려면 그만큼 투자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기업도 아닌 정부가 말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적정한 시간동안 일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아가면서 자기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쓰고 버려지는 직장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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