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전 의원 "50년 된 저비용 건강보험 구조 한계…가치만큼 제대로 지불하는 시스템 필요"
가난한 시절 도입한 제도 의약분업·의료대란 통해 모순 폭발…글로벌 경제 대국 10위 된 이제는 바꿔야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50여 년 전 저비용 구조로 짜여진 건강보험 체계를 글로벌 경제 대국이 된 이제는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원가 이하로 과도하게 억눌러 온 분야에 제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 과정에서 의료계가 전문가 집단으로서 권위를 갖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은 14일 강릉 세인트존스호텔에서 열린 한국보건행정학회 학술대회에서 25년 전 의약분업 사태와 현재 의정 갈등이 발생한 기저에는 빈곤 국가의 유산, 국가 주도 발전의 유산이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정부가 원가 이하의 수가로 밀어붙여 도입한 건강보험제도가 50년 가까이 유지되면서 2000년 의약분업 사태, 2024년 의정 갈등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빈곤 국가의 유산, 지역·필수의료에 과소 투자…의약분업 과격한 추진에 큰 흉터 남겨
윤 전 의원은 “우리가 가난할 때 건강보험 제도를 들여왔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불 의사액 자체가 작았고, 그래서 저비용 구조로 만들었다”며 “정부는 스스로 공적 비용을 제대로 투입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리베이트, 교차보조 등의 편법으로 우회했다. 싸게 막으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싸게 막으면서 이면에는 시스템을 왜곡하는 문제들이 누적됐다. 단지 의사 인건비만이 아니라 지금 닥친 필수의료 문제, 수도권 대학병원으로 환자가 쏠리는 문제들은 사실 우리가 지역의료, 필수의료에 과소 투자하고 있었단 의미”라며 “그게 빈곤 국가의 유산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데도 이 꼬여있는 시스템은 계속 이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난했을 때 편법으로 대충 얼기설기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그걸 끌고 온 세월이 50년 정도 된다”며 “이제 우리는 글로벌 경제 대국 10위다. (현재 비용 구조는) 글로벌 10위의 경제 대국으로서 쪽팔린다. 아직도 우리 공동체가 가난한 시절 콩나물 값을 깎던 때의 마인드를 갖고 있는데, 줄 건 주고 고비용 구조로 가야 하는 건 가야 한다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윤 전 의원은 국가 주도 발전의 유산과 관련해선 의료계가 전문직 집단으로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만드는 부분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발전은 국가 주도이다 보니 정부와 의료계의 관계도 굉장히 수직적이었다. 이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의약분업 때를 되돌아보면 의약분업은 전 세계에서 안 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굉장히 과격한 방식으로 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갈등이 됐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그럴 때 의사들이 방향의 문제와 방식의 문제를 잘 구분해서 의견을 냉정하게 내놓는 부분이 부족했다”며 “전문가 집단은 스스로 규율과 자정 기능을 갖고 정부 정책 파트너로 국민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 직종의 경제적 이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전문 직종으로서 영이 서게 하는 앞부분의 역할이 모자랐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이 늘려야 하지만 경제성장 둔화 탓 한계…재배분 위한 의료계 내부 조율 필요
윤 전 의원은 의료 분야의 절대적 파이를 늘려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향후 경제 성장의 둔화로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의료비는 이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으로 올라왔고, 경제성장률은 2030년부터 0%대, 2040년에는 마이너스(한국은행 추계)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절대액의 막대한 증가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향후 늘어날 파이를 어떻게 재분배할 것인지를 놓고 의료계가 내부 조율을 통해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게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전 의원은 “지난해 의료계 분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 필수의료에 돈을 더 넣는 방식은 다른 분야와의 재배분이 아니라 다른 분야는 그대로 두고 필수의료에 투입되는 걸 더 늘리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지금처럼 (의료비) 덩치가 커진 상태에서는 당장은 몰라도 곧 재배분의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건강보험 재정을 어디에 써야 할지 우선 순위 측정이 필요하다. 이건 결국 건강보험 급여 패키지를 어떤 방식으로 확대해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며 “그걸 정부 관료들이 할 순 없다. 의료계가 전문성, 사회정책적 합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목소리를 내고 정부와 얘기하는 구조를 확립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정단체로 의사협회가 있지만 그동안 의사 직종 전체의 품격과 전문성을 대표해서 ‘우리의 목소리입니다’라고 내놓을 수 있었는지 회의적”이라며 “의협은 (직종의) 단기적 이익을 보호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래서 국민들도 의료계에 대해 무조건적 신뢰를 보내거나 정책적 목소리에서 의료계에 힘을 실어주는 분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전 의원은 “정부 책임을 물타기 하거나 하려는 건 아니다”라며 “지난 50년간 우리는 숨 가쁘게 여기까지 왔다. 의약분업을 주도하거나 대응했던 분들은 후진국에서 태어나 후진국에서 공부했다. 그분들이 진력을 다해서 좋은 제도를 만들려고 했지만 당시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적어도 의약분업 이후 20년 동안 그 문제를 계속 누적시킨 것에 대해선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생각해 봐야 한다”며 “지금 우리 대에서 역량을 다해 이 문제를 끊어야 한다.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내는 매커니즘을 설계하고, 국가와 모든 것을 함께 기획하고,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통로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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