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윤영채 기자] 최근 의료법에서 분리된 보건의료단체 단독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꾸준하게 단독법 제정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온 분야는 단연 간호계다.
간호계는 예방과 만성질환 관리 중심으로 보건의료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간호사의 다양성, 전문성을 강조하며 간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의료기관과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간호전달체계 확립을 위해서도 간호법 제정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료계는 간호법이 실현되면 의료인 면허와 의료체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17대 국회에서 좌절된 간호법 제정이 20대 국회에서는 추진될 수 있을까. 메디게이트뉴스는 ‘간호법’ 발의의 역사와 주요 쟁점, 향후 운명에 대해 조명해봤다.
1970년대부터 간호법 제정 총력...번번이 고배
‘간호법’은 간호계의 해묵은 과제다. 간호협회는 지난 1970년대부터 의료법에서 분리된 별도의 간호단독법 제정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지난 2005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선미 의원은 17대 국회에서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간호사법’을 발의했다. 당시 ‘의료법’이 간호사 업무를 단순히 의사의 진료행위를 보조하는 정도로 규정하고 있어, 다양하고 전문적인 간호사 업무를 포괄하고 있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해 8월 박찬숙 의원은 간호조무사까지 포함한 ‘간호사법’을 발의했다. 이듬해 5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간호사법 제정관련 공청회’를 열어 각계 의견 수렴을 진행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간호법’은 국회 임기만료 등과 함께 폐기됐다.
하지만 간호법 폐기 이후에도 불구하고 간호법 제정 필요성은 꾸준히 언급돼왔다. 간호협회는 매 집행부마다 ‘간호법 제정’을 주요 추진과제로 꼽았다. 지난 2018년 열린 ‘간호정책선포식’에서 발표된 간호협회의 8대 중점과제에도 간호법 제정이 포함됐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최근 여야에서 간호법이 다시 한 번 발의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상희 의원(더불어민주당)과 김세연 의원(자유한국당)은 각각 ‘간호·조산법안’, ‘간호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두 법안 모두 보건의료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장기요양기관, 노인복지관, 보건소, 가정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적인 간호서비스가 필요하다는 배경에서 발의됐다.
김상희 의원은 ‘간호·조산법안’을 통해 간호사와 조산사, 간호보조인력 등에 관한 사항을 독자적으로 규정했다. 김세연 의원 또한 ‘간호법안’을 토대로 다양화, 전문
화되고 있는 간호의 업무범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간호법 ‘업무 범위’ 쟁점...PA 합법화·직능 이기주의 ‘논란’
하지만 의료계는 ‘간호법’이 의료현장의 갈등과 혼란을 증폭시킬 수 있다며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쟁점은 발의된 ‘간호법안’에서 규정하고 있는 업무범위다.
‘간호·조산법안’과 ‘간호법안’은 간호사의 업무를 환자의 간호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수집, 간호판단·요양을 위한 간호, ‘의료법’에 따른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환자진료에 필요한 업무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간호·조산법안
마. 간호사는 환자의 간호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수집, 간호판단·요양을 위한 간호, '의료법'에 따른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 간호 요구자에 대한 교육·상담·건강증진을 위한 활동의 기획과 수행,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보건활동, 간호조무사가 수행하는 업무보조에 대한 지도 등을 그 업무로 함(안 제15조)
간호법안
마. 간호사는 환자의 간호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수집, 간호판단·요양을 위한 간호, '의료법'에 따른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 간호 요구자에 대한 교육·상담·건강증진을 위한 활동의 기획과 수행,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보건활동, 간호조무사가 수행하는 업무보조에 대한 지도 등을 그 업무로 함(안 제15조)
이와 관련, 의료계는 간호사 업무범위 정의를 기존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업무’에서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변경한 부분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충북의사회는 “‘진료의 보조업무’는 생명과 신체에 위해가 상대적으로 적고 재량적 권한이 제한된 업무를 의미한다. 반면 ‘환자의 진료에 필요한 업무’라 함은 그 업무범위가 의사의 진료행위 모두를 포괄할 뿐 아니라 간호사, 나아가 의료기사 업무범위까지를 포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간호사 단독법은 심각한 직능간 영역파괴와 더불어 간호사의 직업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의료법 제27조에서 규정한 ‘의료인도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는 법조항과도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대한개원의협의회 또한 “의료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의 진료행위와 이를 최대한 보조하는 간호사, 보건의료 직종들의 협업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보조’라 함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일대일 수평적 상호관계이며 협동보완의 의미다”라고 말했다.
대개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적인 의료법을 두고 굳이 ‘보조’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환자의 생명을 다룸에 있어서 각각의 역할과 책임, 즉 자격과 질서 체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라며 “현재 추진되는 간호법은 의료체계의 대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간호계는 간호법 제정이 예방, 만성질환 관리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보건의료현장의 현실을 반영한다며 불법 PA 양산, 의료면허체계 혼선 야기 등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간호사회는 “간호(조산)법은 간호사의 업무 범위 중 하나로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처방 하에 환자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할 때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간호부문에서는 간호사가 콘트롤타워가 돼야 하듯 진료부문에서는 의사가 콘트롤타워”라며 “다양한 보건의료 전문인력 간의 상생과 협력을 통해서만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병원간호사회 또한 “간호(조산)법 그 어디에서도 의사의 고유면허 업무를 침해하고 있지 않고 있으니 자세히 검토해보기를 권한다”라며 “의사와 간호사가 상생할 수 있도록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간호법 운명은...간호계 ‘정치력’도 영향 줄까
오랜 시간을 끌어온 ‘간호법’이 20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되면서 이번에는 실현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선 간호법이 발의된 만큼 이른 시일 안에 공청회, 토론회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조만간 국회에서 간호법 제정과 관련한 토론회 등이 예정돼 있다”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간 간호계가 보여준 정치력이 간호법 제정에도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도 이목이 집중된다.
일례로, 간호협회가 매년 개최하는 ‘간호정책 선포식’에 참여하는 정치인의 규모가 화제다. 특히 지난 2018년 간호정책 선포식에 참석한 국회의원은 6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여야를 비롯해 각 정당 국회의원들은 ‘간호정책 선포식’에서 간호계의 간호법 제정 목소리에 화답하기도 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지난해 열린 ‘간호정책 선포식’에서 “보건복지부에서 적극적으로 간호법을 제정해서 우리나라 의료체계 혁신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도 “간호사법이 없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내년 상반기 간호사 야간근무 수당이 도입된다. 병원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됐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간호법 제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지 의료법 등 다른 법을 개정해 권리 신장을 하는 것이 옳은지 꾸준히 토론하겠다”고 언급했다.
또한 간호사들의 정치분야 진출도 활발하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결과 보건의료인 중 간호사 출신 당선자가 15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윤종필 의원(자유한국당)이 간호사 출신이며 현 신경림 대한간호협회 회장도 제19대 국회의원(보건복지위원·여성가족위원)을 지내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간호협회는 지난 1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남인순 의원(더불어민주당)과 정책간담회를 갖고 간호법 제정, 간호전담부서 설치, 간호서비스 질 제고를 위한 근로환경·처우개선 등을 제안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간호법 제정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과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차관은 ‘2018 간호정책 선포식’에서 “(간호단독법 제정은) 보건복지부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관련 전문가들과 좋은 대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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