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3.18 09:46최종 업데이트 23.03.1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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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대 정형외과학교실의 거인(巨人) 故 김익동 교수님을 추모하며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⑧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필자는 1989년 경북의대를 졸업하고 그 해 경북대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이듬 해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년간 동교실에서 정형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했다. 군의관 복무를 마친 후 다시 2000년 2월부터 2004년 2월까지 동교실에서 전임의와 임상교수를 지냈으며 교실에서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정형외과 의사로서 30년 이상 업을 하고 있다. 이에 경북의대 정형외과학교실과의 깊은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의사로서의 배움의 과정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올해 2023년 경북의대 개교 백주년을 맞이해 2022년 5월 23일 소천하신 경북의대 정형외과학 교실의 거인(巨人)이었던 故 백송(伯松) 김익동 교수님의 일대기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필자가 모교 교실의 초창기 역사를 짚어보고자 2019년 3월 23일 김익동 교수님 댁에서 고인께서 육성으로 말씀하신 내용들을 직접 녹취하고 메모해서 요약하고 편집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지명 등의 정확한 영어표기를 확인 할 수 없어 영어와 한글을 병용했다. 

경북의대 정형외과학교실의 거인(巨人), 故 백송(伯松) 김익동 교수의 일대기 

1950년은 6.25동란이 발발한 해이고 이때 나는 경북의대 본과 4학년에 재학 중 이었다. 군에 지원해 위생병으로 참전한 동료 학우들도 있었고 뒤에 학교에 남아있던 학우들은 소위로 임관돼 전후방으로 옮겨 다니며 군의관으로 근무했는데, 나는 당시 간성 11사단 의무실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러나 의학교육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터라 완전한 의사로 만들어 군의관으로 복무시키기 위해서 서울, 부산, 대구 세 군데서 남은 의학교육이 이뤄졌는데, 나는 서울대에서 4개월을 더 수학했고 1951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군의관으로 전후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부산 31육군병원, 1953년 휴전 당시는 전방 8사단 등에서 근무했고 휴전 후에는 포로수용소 경비부대인 독립 55연대 의무중대장으로 근무했으며 포로석방 당시도 거제도에서 근무했다. 

그 무렵 군대에서 미군들에 의해서 양질의 군의관을 양성하기 위해 한국의 젊은 군의관들 중에서 영어 테스트 등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전국에서 10명을 뽑았고 나도 운 좋게 거기에 포함돼 대전의 171 미군병원에 배치돼 6개월간 전문의 트레이닝을 받아 처음으로 정형외과학을 접했다.
 
 1950년 Dr. Roy Temeles와 함께

이후 63미군병원에 근무하면서 당시 미군 군의관이었던 Dr. 트메르스를 만나게 됐는데, 이것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계기가 됐다. Dr. 트메르스가 알선해 당시 이비인후과 군의관이었던 새미리 소령과 연결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했던 새미리 소령의 도움으로 해외 여행이 불가능 했던 당시 선발된 군의관들10명중 6명이 인턴교육을 위해 군대로부터 휴가를 받아 도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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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비행기 여행은 꿈도 못 꾸고 배로 16일간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고, 이후 애리조나 피닉스의 산마리타 병원에 3명이 수련을 받고 나를 포함한 3명은 산조셉 병원에서 일년간 인턴수련을 받았다. 

미국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한 덕에 미국의 대학병원에 지원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이때 피츠버그대학병원 정형외과에 지원했다. 여기서 퍼거슨 선생을 만났는데, 당시 2대째 모두 하버드대학 출신이기도 하고 하버드대학에 근무하고 있던 퍼거슨 선생이 마침 피츠버그대학의 스틸 선생의 정년퇴임으로 후임을 맡아 피츠버그대학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 무렵 퍼거슨 선생은 시카고 대학 출신 골종양 전공인 Dr. 톰 브라워,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 Dr. 패트릭 랭 등을 풀타임 스텝으로 하고 여러 어텐딩 멤버들로 스텝을 구성해 진료와 레지던트 교육을 했다.

당시 피츠버그 대학병원은 Adult Hospital(Presbyterian Hospital), Children’s Hospital, Veteran’s Hospital, Women’s Hospital(매기 Hospital)로 구성돼 있었다. 나는 이중 정형외과가 있던 Adult Hospital, Children’s Hospital, Veteran’s Hospital 세 군데에서 4년간 레지던트 수련을 받았다.
 
이 시기에 피츠버그에서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한국에서 인턴을 마친 아내는 발티모어시티병원(Baltimore City Hospital)에서 산과 수련을 받고 있었는데, 36시간 연속 근무라는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수련을 그만두고 피츠버그대학 소아병원 영상의학과에 지원을 하게 된다. 당시 소아병원에 근무하던 나에게 영상의학과 주임교수이던 Dr. 페더만이 아내의 지원소식을 알려준 것이 아내와의 첫 만남이 됐다.

나는 당시 유엔대사였던 임창영 대사 부부와 친했고 아내는 과의 부과장인 Dr. 셔먼이 수양 딸처럼 보살펴주고 있었는데 결국 우리는 그분들을 양가 부모로 모시고 1958년 3월 8일 이스트 리버티 처치 라는 곳에서 결혼을 했다. 당시 레지던트의 월급이 한 달에 100달러 정도이고 일년에 25달러 인상되는 식이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월급을 합치니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레지던트와 일년간의 리서치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수련을 마치고 뉴욕에서 펠로우 생활을 했고 수련을 같이 한 동료들은 나에게 미국에서의 공동 개원을 제의했다.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듯해 보였고 아내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그 당시는 아직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이 꽤 남아있었던 시기였고, 나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봐도 역시 보람은 모국으로 돌아가서 후학을 양성하고 배운 것들을 펼치는 것이 옳다고 판단돼 결국 아내를 설득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짐을 싸서 처남이 있던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됐는데, 이때 아내는 큰 아이를 가져 만삭일 즈음이었다. 돈이 없던 당시라 만삭의 몸인 아내와 배를 타기로 했고 공교롭게도 마침 한국에는 1960년 4.19 혁명이 터져서 공항이 폐쇄가 돼버린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아내 혼자 출산을 계획했다가 아내가 혼자 출산하는 것에 겁도 나고 해서 귀국해서 출산하기로 계획했는데, 마침 며칠 후 공항 폐쇄가 풀렸고 AKF Foundation(한미재단)이라는 단체의 도움을 받아 만삭인 아내는 비행기를 타고 나는 배편으로 따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해서 1960년 6월 대구 동산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내는 출산 후에 병원장이던 마팻 선생의 도움으로 정재홍 선생과 같이 병리학을 했다. 당시 한국의 정형외과 환자들의 상황은 자동차가 별로 없어 스피드와 관련된 외상 환자는 적고, 오히려 결핵과 한센병으로 인한 환자가 넘쳐나는 시기였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게도 마팻 원장의 권유로 월드비전에서 운영했던 어린이병원, 장애자들을 치료 하던 성보원 등을 왔다갔다 하면서 여러 환자들을 돌봤고 당시 많았던 척추 결핵 환자의 치료를 위해 마팻 원장의 권유로 홍콩 대학에서 펠로우를 하면서 척추 결핵의 전방 유합술을 배웠다.

당시 구라파를 중심으로 한 미션재단의 지원으로 여수 애양원이 한센병 미션을 하고 있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국 한센병 미션(American Leprosy Mission) 재단이 있었는데 그 규모는 당시 돈으로 수 백억원 이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한센병 치료는 인도가 많이 발달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다시 1962년 6개월간 인도로 가게 됐고 거기에서 Dr. 폴 브랜드(Paul Brand)를 만났다. Dr. 폴브랜드는 건축가인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가 평생 인도에서 미션을 수행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와서 필라델피아 여성병원과 스탠퍼드 대학 등에서 수학 후 수부 쪽에서 명성을 쌓은 후 본인도 인도에서 미션을 수행 중이었다.

당시 Dr. 폴브랜드는 미국 보건부와 협의해 미국 유수의 대학 교수들을 인도 현지에 파견 받아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내가 있을 당시에도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성형외과의사였던 Dr. 뮤레이(Murray)와 존스홉킨스 대학 등에서 많은 교수들이 장단기간 머물면서 공헌을 하고 있었고 운 좋게 나도 13개국 의사들과 대가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오니 여수 애양원 재단을 맡고 있던 Missionary Foundation에서 한센병을 인도에서 수학한 나에게 이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이 인연이 돼 애양원 이사직을 오랫동안 맡았다.
 
당시 유랑하던 한센병 환자들

이렇듯 동산병원에서의 11년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봉사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뭔가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대학과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팻 원장에게 대학을 세울 것을 권유했으나 마팻 선생은 당시 의과대학 설립을 위해서는 500만달러가 필요한데, 미션을 위해 세계각지에서 모금한 돈은 순수하게 미션에 사용돼야 한다고 생각해 대학 설립을 포기했다.

그러던 즈음 나에게는 또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당시 고려병원(현재 강북삼성병원) 이사장 이었던 고 조운해 선생이 고액의 연봉을 제안하며 고려병원에서 근무하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갈지, 아니면 여러 배움의 기회를 알선해준 마팻 원장을 도와서 미션을 계속 수행하면서 동산병원에 남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있던 중 당시 외과에서 독립돼 설립된 경북의대 정형외과학 교실의 주임교수이던 서주철 교수가 갑작스럽게 서거해 공석이 된 주임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당시 홍선희 원장, 서순봉 학장이었는데, 그때는 교수직을 주는데 참 인색했고, 41세이던 나에게 주임 교수직을 준다는 것이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1971년 7월 드디어 미션수행과 서울행을 포기하고 모교 정형외과학교실로 가기로 결심했다.

동산병원에서 11년동안 정열적으로 일해서 힘은 좀이 빠진 상태였지만 교실에 와서도 당시는 참 열심히 일한 기억이 나는데, 너무도 일찍 돌아가신 고 이수영 선생과 인주철 선생이 특히 함께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의국원으로는 박노대, 고 김용배, 고 이용태 선생 등이 참 기억에 남고 형제간 같이 지냈던 것 같다. 또한 내가 교실에 오기 전에 앞서 이홍건, 서주철 교수 시절에 의국을 졸업하신 정용국, 박진홍 선생 등을 위시한 많은 동문들과 내가 배출한 의국원들 사이의 관계를 좋게 이어주는데 정인호 선생과 고 김용배 선생이 많은 노력을 해줬고, 나도 당시 삭막한 의국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낸 생각이 부인회들을 활성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경북의대 정형외과 의국이 그 전통과 명예를 이어오고 있는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이제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대동아전쟁, 6.25동란 등 파란만장한 시절을 살았고, 모두들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기회가 없었고, 모든 것이 선진국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다. 미국에 남았다면 삶이 편했겠지만 그것을 버리고 모국으로 돌아 온 것에 대해서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요즘은 발전된 한국의 우리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스스로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 있는지를 보면 감개무량하다.

끝으로 본인도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도 나를 위해 평생 자신을 희생하고 따라주고 내조해준,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이 기회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작년에 소천 하신 김익동 총장님과의 인터뷰를 정리하고 글은 쓰면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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