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충북 영동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25살의 청년은 과거를 회상하며 잠시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겨울이면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밭을 휘젓고 다녔고, 이웃 할머니 집을 찾아가 눈을 치우고 말 동무를 해드리곤 했다. 농사철엔 모내기를 하다가 거머리에게 물리기도 했고, 벼를 베다가 발가락이 잘려 접합 수술을 받는 아찔한 경험도 했다.
초등∙중학교를 다니는 대신 홈스쿨링을 받은 그는 10대 초반이던 2009년부터 언론의 글을 기고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했다.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다. 초반에는 시험에서 수학 5등급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신통치 않았지만, 졸업할 즈음엔 1등을 꿰차고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 졸업 후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그는 올 3월부터 대전성모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근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언제 병원으로 돌아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산골 마을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소년은 어느덧 20대의 젊은 의사가 돼 국내외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지난 16일 정부의 일방적 의료정책 강행에 반발해 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한 류옥하다 전 가톨릭중앙의료원 인턴 대표의 이야기다.
정부가 지난 2월 초 필수의료 패키지와 의대정원 2000명 확대 계획을 발표한 이후 정부와 의료계는 강하게 충돌하고 있다. 전공의가 병원을 사직하고 의대생이 일제히 휴학계를 제출했지만, 정부는 2000명 증원은 최소한의 수준이라며 강경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27일 서울성모병원 인근에서 메디게이트뉴스 기자와 만난 류옥 씨는 “누군가는 전공의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진심을 담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정부의 처벌 경고에도 언론의 취재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향후 계획에 대해 “정부가 정책을 강행하면 다시 산골 마을로 돌아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 생각”이라며 “사태가 해결되더라도 병원으로 돌아갈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은 류옥하다 씨와 일문일답.
사람들 치유하려 의사 택해…주 100시간 이상 근무하고 첫 달 월급 199만원
-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는 뭔가.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실제로 성직자가 되고 싶단 생각도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아프고 외로운 순간 옆에 있어줄 수 있는 게 의사 아닌가. 그 부분에 보람을 가장 크게 느꼈다. 자랑 같지만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모범 인턴상, 올해의 인턴상을 받기도 했다. 환자들이 많이 추천해준 덕분인데, 진심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일할 예정이었다. 응급의학과에 지원하게 된 계기가 있나.
원래는 정형외과도 생각했다. 예전에 목공을 조금 했는데 정형외과와 비슷한 부분이 있더라. 어머니를 도와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기도 해서 웬만한 가구는 다 만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학생 때도 정형외과에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솔직히 정형외과는 경쟁률이 높아서 떨어질까 봐 걱정되더라. 그러던 차에 응급의학과야말로 환자들이 가장 힘들고 외로운 순간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전문과란 생각이 들어 지원했다.
- 지난 1년간 인턴으로 일했는데 근무 여건이나 급여 등은 어땠나.
인턴 처우는 심각한 수준이다. 첫 달에 월급이 199만원 정도 나왔다. 주 100시간 이상 일하면서 받은 월급이 그랬다. 환자를 생각하는 사명감이 없으면 인턴으로 일하지 못 한다. 그래도 보람을 느낀 일도 많다. 만성 변비 환자의 대변을 손으로 직접 파내고 환자 보호자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았던 순간이나,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 그렇게 힘든 시간도 버텼는데 지난 16일 사직을 했다.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거의 모든 전공의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사라면 누구나 근거 없고 비과학적인 의대정원 증원과 설익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보고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조용히 그만둔 전공의들도 많다. 난 그저 다른 이들보다 먼저 그만두고 동료들에게도 생각해 보라는 글을 올렸을 뿐이다.
국내외 언론과 연일 인터뷰 "시민 기자 16년 차, 잘할 수 있는 일 하는 것"
- 국내외 언론과 연일 인터뷰하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뭔가.
용기를 먼저 냈다. 누군가는 평범한 전공의의 현실을, 진심을 담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으면 전공의의 목소리는 묻힐 것이다. 언론에 글을 기고하는 시민기자로 활동해 온 게 16년째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 정부에선 체포, 면허정지∙취소 얘기까지 나온다.
제발 면허정지를 해줬으면 좋겠다. 군의관, 공중보건의사라는 특권을 포기하고 현역으로 입대하겠다. 엄포만 놓지 말고 죄가 있으면 빨리 잡아가라. 내가 잡혀가는 순간 로이터, BBC 등 외신을 포함한 국내외 언론들이 카메라를 대동해 취재하기로 했다. 나를 체포하는 게 합리적이라면 보도해도 문제없지 않겠나. 그런데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내가 잡혀가는 모습이 보도되면 우리나라는 정상적인 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당하다. 당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하겠다.
맞다. 부모님은 '네가 나서지 말라'고 하시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나. 결국 지금은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고 계신다.
강 대 강 대치 아닌 정부의 '보건의료 독재'…중재 움직임엔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
- 정부와 전공의가 강 대 강으로 대치하면서 최근 의대 교수를 중심으로 중재에 나서겠다는 움직임이 있다.
우선 '강 대 강 대치'라는 표현부터 바로 잡고 싶다. 강 대 강은 정부가 사용하는 표현이다. 강 대 강이 아니라 갑인 정부와 을인 환자, 환자 보호자, 전공의가 있을 뿐이다. 지금 상태는 정부의 일방적 ‘보건의료 독재’다. 그래서 중재는 정부의 프레임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내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게 해줬으면 한다. 실제 예비 인턴이나 의대생의 거취도 선배인 전공의들이 결정해선 안 된다. 내부에서 해당 사안을 투표에 부치자는 얘기도 나왔는데 나는 극렬히 반대했다. 후배들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야지 왜 우리가 개입하나. 누구도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다.
- 전공의가 빠져나가면서 의료대란 우려가 크다.
수련생 신분인 전공의가 떠난다고 의료 시스템이 무너진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대표적인 병원들은 전공의 비율이 10% 남짓이다. 반면 서울대병원 전공의 비율은 46%나 된다. 애초에 국내 병원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공의라는 싼 인력을 활용해 병원들이 이득을 봐왔고, 국가와 국민들은 낮은 비용으로 의료를 이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 전공의가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는 건 사실이지만, 국민들은 의사들이 전반적으로 높은 소득을 보장받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개원의로 한정해서 조사한 몇 개의 잘못된 지표들 때문에 일어난 오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지난 202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명목 GDP(국내총생산) 대비 의사 임금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35개국 중 29위다. 의사 임금이 결코 많은 게 아니다. 그리고 소송 위험이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영국은 1년에 기소가 1~2건 수준인데, 한국은 하루에 2건 이상이다. 우리나라는 소송 위험은 압도적으로 높은 반면 의료비는 훨씬 낮은 형태로 유지돼 왔다.
의대정원 최대 1500명 감축도 고려해야…사태 해결 안 되면 농사지으며 살 것
- 정부는 의대증원 2000명은 최소 수준으로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의대증원 규모를 갖고 줄다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의대정원이 아니다. 평균 수명, 신생아 사망률, 예방 가능 사망률, 도농 간 격차 등 많은 지표가 다 OECD 상위권인데 왜 의료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다. 설령 문제가 있다고 보고 개선하려 한다고 해도 수단이 의대증원과 설익은 필수의료 패키지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던져 놓으니 나머지 것들은 다 묻혔다. 의대정원은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논의해야 한다. 지금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났는데도 큰 사건이 없는 걸 고려하면 오히려 정원을 1000~1500명 정도 감축해도 된다고 본다.
- 정부는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에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한 지원책이 담겨있단 입장이다.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는 독소 조항과 눈 가리고 아웅식의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정부가 10조원을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에 지원하겠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10조원이라고 뭉뚱그려 놨다. 정부가 저출산에도 예산 280조원을 썼는데,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방범용 CCTV같이 저출산 문제 해결방안이라고 볼 수 없는 내용도 다수 포함돼 있다. 필수의료 예산이라는 10조원 역시 얼마가 어디에 어떻게 지원될지 알 수 없다.
- 정부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면 전공의들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은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의 의견을 지지한다. 대전협이 요구한 7개 조항(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2000명 의대증원 전면 백지화, 의사수급 추계 기구 설치, 수련병원 전문의 채용 확대, 불가항력 의료사고 법적 부담 완화, 주 80시간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전공의 대상 부당한 명령 전면 철회 및 사과, 업무개시명령 폐지)이 받아들여지면 돌아갈 의향이 있다. 물론 이번 사태를 통해 많은 모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실제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나를 포함한 필수의료 전공의 3분의 1, 2분의 1은 이번 사태가 잘 마무리돼도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소위' 바이털(vital, 필수의료) 뽕’에서 깨어났다는 얘기들도 나온다. 아마 내년 필수과 지원율은 심각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R&D로 이공계를 망가뜨리더니 의료계도 망가뜨리고 있다.
- 정부가 기존 계획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다른 전공의들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먹고는 살아야 하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포도 농사를 지으려 한다. 그래도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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