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5.10.14 08:03최종 업데이트 25.10.1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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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 유지법’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법인가, 위협하는 법인가

[칼럼] 김재연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분만실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돕던 의사들은 하나둘 현장을 떠나고, 산모들은 아이 낳을 곳을 찾아 원정길에 오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필수의료의 비극적 자화상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필수의료 유지법안’을 발의했습니다.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의사들의 진료 중단을 법으로 막겠다는 취지입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저는 필수의료의 최전선을 지키는 산부인과 의사이자 법률 전문가로서 단언합니다. 이 법안은 무너지는 시스템을 살리는 처방이 아니라, 남은 의사들마저 떠나게 만들어 필수의료의 숨통을 끊어 놓을 ‘독약’이 될 것입니다.
 

병의 원인은 외면한 채 증상만 억누르는 법안
 

의사들이 왜 분만실과 수술실을 떠나는 걸까요? 사명감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한 진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결과가 발생하면, 의사는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고 수십억 원의 배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수십 년째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가로는 더 이상 병원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필수의료 붕괴의 진짜 원인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이 근본적인 병폐는 외면한 채, 의사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쇠사슬을 채우려 합니다. 살얼음판 같은 진료 환경은 그대로 두고,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멈추면 징역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이는 국가가 져야 할 ‘필수의료 유지’의 책임을 개별 의사와 민간 병원에 떠넘기는 무책임한 처사일 뿐입니다. 불은 끄지 않고 연기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 굴뚝만 틀어막는 격입니다.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한 굴뚝은 언젠가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헌법 위에 군림하려는 입법적 월권
 
더 큰 문제는 이 법안이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점입니다. 헌법 제15조는 모든 국민에게 ‘직업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여기에는 부당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됩니다. 의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정당한 사유 없이’라는 모호한 규정은 정부에게 자의적인 칼날을 쥐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유가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겠습니까?
 
이는 법치주의의 근간인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하며, 의사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위헌적 발상입니다.
 
의료계가 끊임없이 대안으로 제시해 온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수가 현실화 등 근본적인 해결책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처벌과 강제라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전문가 집단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것은 명백한 입법적 월권입니다.

발의자의 역설: 파업 지도자가 파업 금지법을 만들다
 

이 법안이 가진 가장 큰 모순은 발의자인 이수진 의원 자신에게서 발견됩니다. 그는 간호사 출신의 저명한 노동운동가로서, 2007년 연세의료원 노조를 이끌고 무려 28일간의 장기 파업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권익과 근무 조건 개선을 위해 ‘파업’이라는 강력한 단체행동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환자의 수술이 연기되고 진료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환자 불편을 감수했던 파업 지도자가 이제는 국회의원이 되어 똑같이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는 의사들의 손발을 묶는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이중잣대입니다.
 
2020년 의사 파업 당시에도 “강력히 처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며 누구보다 강경했던 그의 모습은 이 법안이 환자 안전에 대한 소신이 아니라 특정 직역에 대한 편향과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깊은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강압이 아닌 협력으로, 파멸이 아닌 해결로 가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이수진 의원님께 호소합니다. 진정한 환자 안전은 겁에 질리고 소진된 의사에게 억지로 메스를 쥐여준다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의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안전하게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이 법안은 필수의료를 살리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파멸로 이끄는 막다른 길입니다. 국회는 지금이라도 이 위험하고 분열적인 법안을 폐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처벌과 강압이 아닌,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필수의료 시스템을 재건하는 어렵지만 올바른 길에 나서야 합니다.
 
비고의적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을 덜어주고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보장하며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고 진정한 해법을 찾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필수의료 살리기’입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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