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5.21 09:22최종 업데이트 24.01.2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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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예술 행정가로서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된 '경북의대' 모교 꼬리표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⑳류형우 10대 대구예총 회장(53회)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⑪김정용 대구 동구보건소장·전 개성공단 협력병원장
⑫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⑬채성철 경북의대 명예교수(순환기내과)
⑭정진향 경북의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⑮안동빈 경북의대 이비인후과학교실 주임교수 
⑯박순우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학장
⑰이원순 대구광역시의사회 명예회장
⑱박성민 대한의사협회 의장
⑲채종민 경북의대 법의학교실 명예교수 
⑳류형우 10대 대구예총 회장 
 
TBC 대구경북 상생포럼 
모교가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그동안 졸업한 동문들의 칼럼을 모으는 가운데 필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아마도 그것은 전통적인 의사의 길을 가고 있지 않고 문화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 어쩌면 '돌연변이 동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 생각한다.

모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고 또한 모교에 대한 감사함과 학창시절을 회상해보는 귀한 시간이 됐다. 그러나 필자의 살아온 경험들이 나에게는 의미있는 추억이지만 다른 이에겐 또 다른 호사로 받아들여질까 조심스럽다. 
 
대구예술상 시상식
필자는 4년간의 대구예총 회장을 마치고 5년 전 어느 봄날 드디어 자유와 해방을 선언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의사라는 직업과 사회 속 역할 중심에서 온전히 가족과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지난 세월 바쁘게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그야말로 나의 이상향, 슬로우 라이프,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꿈꾸며 또 다른 주도적인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막연히 문화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예전의 어려웠던 시절에는 누구나 대부분 문화예술과는 먼 삶을 살아왔다. 특히나 청소년 시절, 집에 여러 번 불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문화예술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그 당시에 주위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교우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을 보면 무척 아름답게 보였고 막연한 동경과 부러움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동문들도 다 그렇겠지만 나도 의사가 되어 사회와 가정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먼 훗날 여유가 되면 부러운 눈으로 항상 봐 왔던 예술을 가까이하고 내 가슴속 예술적 감성을 되살리리라는 생각을 했다.
대구청소년무대예술페스티벌 시상식

천신만고 끝에 자랑스러운 모교에 입학해 보니 메디컬 사운드, 메디컬 챔버 오케스트라, 포커스, 현우회 등의 공연과 전시 예술동아리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예술도 함께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우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동안 예총 등 예술행정을 하면서 느껴보니 의술과 예술 둘 다 인간을 이해해야 된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됐다.

의술은 아픈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학문이고 예술은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의술과 예술은 비슷한 면이 많다. 그래서 의과대학생 시절부터 예술을 가까이 하고 학교에서도 지원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 퍼레이드

의과대학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자신 모교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또 은사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의술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지혜, 좋은 습관들도 배우고 평생 친구도 그때 얻었다. 학교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덕택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로 골목길을 내 집 드나들듯하면서 때로는 일탈도 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최고의 명문의대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대단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정든 모교를 떠나 전공의 과정을 거쳐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밤낮없이 의료현장을 지키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다가 사진예술을 접하게 된 건 1990년대 초인데, 많은 환자에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주변에서 쉬어가는 것을 권유했고 그러던 차에 우연히 중형 카메라를 가지게 됐다. 뷰파인더로 본 세계가 너무 아름답게 보이고 만사가 일상과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새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진예술에 푹 빠졌다. 
 
동아시아문화도시 대구 개막식

사진예술은 빛을 통해 사물을 생략하거나 강조함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한다. 진료가 없는 날 새벽에 틈만 나면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나갔고 자연 속에서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처음부터 나는 대자연의 풍광에 매료돼서 국내외 오지를 헤메고 다니거나 트레킹을 하면서 작품을 얻고 있다. 그 결과 여러 차례 전국사진공모전 입상을 통해 1990년대 중반에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이 됐다. 수년 동안 걸으면서 우연히 얻어 걸린 작품으로 3년 전에는 '길 위에서 길을 찾다'란 테마로 수성아트피아 초대전을 하기도 했다.

개인병원을 운영했는데 운이 좋았다. 그 이후 4명이 공동투자해서 개업한 파티마여성병원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2004년엔 대구시지에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열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0석 규모의 하우스콘서트 공간과 갤러리를 겸한 ‘예지앙’은 이렇게 문을 열었다. 매월 1회 콘서트와 2회 초대전이 무료로 개최했고 당시 다양한 장르의 많은 예술인들과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됐다.
 
동아시아문화도시 창사 개막식
그러던 중 대구광역시 8개 구군중 수성구만 문화원이 없었는데 수성구청장을 만나서 협의를 했다. 전통문화와 지역문화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대도시에서 도시형문화원의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고 설득을 했다. 그래서 2005년 말 대구수성문화원이 창립됐고 46세 나이로 전국 최연소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전통문화 발굴, 보존, 발전과 더불어 지역문화 창달을 위해 지방문화원법에 의해 수성문화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역민들의 문화적 갈증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컨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때 기획했던 상화문학제와 고모령효축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 청두 예술단과 함께

당시 이민 열풍을 보고 나라사랑 정신을 강조해야겠다는 생각에 상화문학제를 기획했다. 현대판 고려장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것을 보고 희석돼 가는 효의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고모령효축제를 개최했다. 특히 상화문학제는 다양한 콘텐츠를 담은 대구지역 최초의 문학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구수성문화원을 책임지면서 자연스레 각개각층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게 되고,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직책도 맡게 됐다. 대구아트메세나 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중앙이사,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집행위원, 대구음악발전포럼 회장, 대구문화재단 설립추진위원등 여러 참여를 통해 대구문화예술계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도 하게 됐다.
 
한중일 청소년 문화교류 (갓바위 등산)

당시 대구문화재단 설립으로 대구예총의 위상이 흔들릴 우려가 커지자 주위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예총 회장 선거 출마를 권유받았다. 처음에는 ‘의사가 예술을 알면 얼마나 알까’라는 부정적 시각과 ‘의사가 어떻게 개성 많고 말 많은 예술계, 음악, 미술, 문학, 연극, 무용, 사진, 국악, 영화, 연예, 건축 등 다양한 10여개 장르의 1만여 명의 회원을 가진 예술인들의 수장으로 통합해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많았다. 그러나 임기 4년 동안 대구예술 발전과 대구예술인들의 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여러 노력들에 대해 후한 평가를 받고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물러났다. 

2014년 10대 대구예총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구의 힘은 예술입니다'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대구예술의 역사성, 우수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대구예술인들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래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2000명이상의 예술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대구예술인의 날, 예술인 어울림 한마당을 개최했고 특별한 기획으로 대구예술상의 권위와 품격을 높였다.
 
대구-닝보(중국) 예술교류

또한 임기동안 예술계 예산 파이를 3배 이상 확대해서 지원의 폭을 넓혔다. 국제교류도 기존 2개국 2개 도시에서 일본, 중국, 몽골,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6개국 8개 도시로 확대했고 광주와 예술교류도 시작했다. 또한 예총은 순수예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지만 그러나 함몰돼선 안된다는 인식아래 실용예술, 생활예술, 청소년 예술을 모두 품는 예술 영역의 확장도 했다. 그 일환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대구청소년무대예술페스티벌을 처음으로 개최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중일 3국이 역사적 갈등과 반목을 문화로 풀어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국제 행사가 있다. 3국이 매년 도시를 정해 번갈아가며 동아시아문화도시 행사를 하는데 2017년에는 한국에서는 대구, 중국은 창사, 일본은 교토로 지정됐다. 대구에서는 내가 자문위원장을 맡아 예총에서 행사를 전체 18개 콘텐츠 중 11개를 위임 받아 주도적으로 개최했다. 동아시아 행사가 생긴 이래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행사를 위해 2017년도에는 20회 이상 해외를 다녀와서 가장 바빴던 한해가 되었던 것 같다. 

예총 회장 임기 전후로 대구문화재단 이사, 대구오페라하우스 이사, 대구아트스퀘어 조직위원장, 대구호러축제 조직위원장, 대구경북 자유교육연합 상임대표, 달빛동맹 민관교류협력위원회 위원장 등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감투도 많이 맡았다.
 
대구-몽골 예술교류

인상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지금은 파워풀로 바뀌었지만 컬러풀 대구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4년 동안 하면서 행사 구간을 중앙로에서 국채보상로로 옮겨 왔다. 훨씬 더 여유 있는 공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컨텐츠로  시민 100만 명 이상이 즐기는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적 퍼레이드로 성장시키는데 일조한 일이다.

임기 중에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선정, 간송 미술관 유치, 전국 무용제와 대한민국 연극제 유치를 위해 대구시와 긴밀히 움직였던 것도 보람이 있었다. 

의료현장을 떠난 지는 벌써 9년이 지나간다. 젊은 시절에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고 무엇이든지 노력한 만큼 이뤄진다는 생각이 나를 채찍질했다. 그래서 그동안 산부인과 의사로 지역 사회를 위해 밤낮없이 환자를 보면서 열심히 살아왔고 또한 예술 행정가로서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공한 삶이 부귀영화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는 그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내 앞에 주어진 일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진솔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경북의대를 졸업한 것이 큰 행운이고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교에서의 소중한 추억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을 공급했을 것이고 성장하면서 모교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나의 DNA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내 이력에는 항상 모교 꼬리표가 붙어있기에 의사 생활을 할 때나 예술계에 몸담고 있을 때도 학교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왔다. 지금까지 경북의대 100년은 자랑스러운 긴 역사와 더불어 한국 의료의 밑거름이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솔개는 70년을 산다고 한다. 그런데 40년이 지나면 사냥을 하지 못할 만큼 부리와 발톱이 망가진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바위에 반복해 부딪혀 헌 부리와 발톱을 뽑아버린다. 새로운 부리와 발톱을 갖기 위한 생존 본능이자 몸부림이다. 

경북의대가 지방시대를 뛰어넘어 도약하는 10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모교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구성원 모두가 심기일전해서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고 적응하면서 변화해가야 할 것이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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