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 중심 사고가 가져온 ‘의료 붕괴’... 젊은 의사 고부담 고위험 회피와 필수과목 이탈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세계에서 유교가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나라를 꼽으라면 대한민국을 비롯해 베트남, 타이완, 중국, 일본을 들 수 있다. 유교는 공자가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중국의 고대 주나라 때부터 약 2000년 가까이 황제의 권한과 관료 전제주의의 근간이 됐다고 한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예(禮)’는 계급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사회구조의 견고한 유지가 목적이었다.
유교에서 법은 곧 형벌과 연계돼 폭력을 막고 악을 제거하는 장치였고 체계였다. 예(禮)는 해석에 따라 군주를 위한 통치 기반이며, 반면에 군주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여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장치로써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찍이 공자는 형벌보다는 예(禮)를 통한 교화 방법인 ‘예치(禮治)’를 이상적인 정치로 여겼다고 한다. 예(禮)는 사람들의 자율적 도덕심을 키워 사회를 바르게 하는 장치로써 형벌은 최후의 수단임을 강조했다. 공자는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은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려고만 한다고 그 속성을 이미 오래전에 간파했다.
겉은 유교적이지만, 진짜 속은 경직된 권위주의적 형법 중심 사고가 지배
조선의 유교 전통은 일제 강점기 통제 중심의 법제를 거쳐 군사 정권기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이어졌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나라는 유교의 예(禮)가 원래 의도했던 자율적 도덕적 질서보다는 질서 위반은 곧 형사처벌이라는 경직된 사고가 매우 강하게 뿌리 내리게 됐다. 일제하에서 탄생한 법학 분야의 전문직 역시 이런 사조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나라에서 법조인 양성 과정에서 형벌 중심 사고는 당연한 것이 됐다.
현재도 우리나라는 형사처벌의 과잉 문제가 범사회적 부담이 되고 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는 형사 범죄로 취급되는 행위가 상대적으로 매우 넓다고 한다. 행정적 지도나 사회적 합의보다는 법적 형벌적 제재를 우선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법과 제도의 권위는 강해졌을 수 있으나, 국민이 자발적으로 예로서 지키는 자율적 공동체적 규범은 아직도 발달 미숙 상태에 빠져 있다. 예치(禮治)의 고유한 정신보다는 형식만 강조된 셈이다. 예(禮)가 유지됐다면 공동체적 합의와 자율적 실천으로 공동체 규범을 재건할 수 있고,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해 보이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데 순탄한 지름길이기 때문에 아쉬운 대목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법조계, 특히 검사와 판사가 ‘처벌은 곧 정의 구현’이라는 형법 중심 사고는 엄밀히 보면 우리나라가 유교 국가라는 인식과는 매우 어긋나 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현대 사회는 회복적 정의와 예방적 법문화를 추구하는데,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형법 권위주의가 우리나라를 강하게 억누르며 지배하는 느낌이다. 앞으로 의료 개혁과 더불어 검찰개혁도 모든 정권마다 정치적 단골 메뉴가 될 모양새다.
국가의 권위는 반드시 형벌의 규모와 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가 없는 나라에서 국민과 여론은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국가적 권위가 추락한 나라에서는 이런 사회적 현상으로 정권이 유지되려면 마치 형사처벌의 강화가 곧 정의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근 현직 검사로부터 우리나라 형벌 중심 사고에 대한 강의를 들어보니 의료 형사 범죄화는 ‘법리적인 원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며 독재주의 속에 정착된 우리나라의 관습처럼 변형된 것이었다.
얼마 전 의료정책연구원이 주관한 특별강연에서 강의를 맡았던 검사는 해외에서 수학한 경험으로 다른 나라의 법 제도를 비교하며 보다 실체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됐다. 교과서 암기 위주의 우리나라 법학 교육과는 달리 경험과 토론을 중시하고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개방된 사고의 학습 경험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의료 형사 범죄화가 너무나 과도하다는 사실과 선진국에서 의료는 형사 범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일깨워줬다. 기존의 법조인이나 다수의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을 상대로 형벌 중심주의 법조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의료 형사 범죄화로 형사처벌 받은 의사는 억울한 일이고, 의료계로서는 큰 짐이다. 고위 관료들 역시 우리나라 관료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형벌 주의’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관료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법학 전공자는 관료나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다양하게 열려있다. 관료와 법조계가 형성한 정치와 사회의 중심 세력이 우리나라의 형벌 중심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적극적인 사회 운동과 동력이 필요해 보인다.
법대로 규정대로 합리적 착시현상, 관료적 형식주의 경직성이 창의적 사고 질식
우리나라가 진정 건강한 유교 사회라면 형사처벌은 최후의 수단이며 비 형사적 대안으로 회복과 예방을 위한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데, 최근의 정치적 상황만 보아도 정의 구현을 위한 보복이 마치 민주적인 정치 방식으로 교묘하게 각색돼 보인다. 이런 과도한 형사처벌 문화는 우리나라의 관료주의와 결합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있다.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합리적 결정보다 절차와 규정 준수가 우선인 형식주의, 그리고 합리적이고 창의적이며 보다 유연한 해결책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회피기동의 복지부동이 현재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관료주의의 모습이다. 법 위반은 무조건 처벌한다는 형법 사고와 규정대로 처리한다는 경직된 관료주의는 의전과 형식적 준수가 최우선이다. 관료주의는 사안별 맥락보다는 서류의 완벽함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하게 여긴다. “법대로 규정대로”라는 책임 회피성 답변 역시 형벌 주의 배경에서 싹트고 발전한 생존전략이다. 형벌 과잉은 관료적 형식주의와 함께 법조의 경직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여기에 더해 시민과 환자를 대변한다는 명분의 각종 다양한 단체들은 타협과 중재보다는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의사들을 악마화하고 이기적 집단의 틀에 가둔 상태로 ‘처벌’과 ‘처단’을 서슴없이 요구한다. 정부는 다양한 시민·환자 단체에 ‘국민의 뜻’이라는 숭고한 명분을 부여한다. 그리고 정부 주도 공청회나 각종 토론회에서 시민단체나 환자단체는 사회 조합이 아닌 국가 조합처럼 ‘정부 입장’을 충실히 대변토록 하고 있다.
비정부 시민단체가 사회적 협의체 역할이 아닌, 정부 정책 추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관변단체 역할을 맡아 진정한 의미의 환자 권익 대변보다는 관료적 정책 정당화에 크게 기여하고 일조하는 듯하다. 이들 역시 우리의 형벌 문화에 익숙한 집단이기에 형벌로써 정의 구현을 시도하려는 기조가 느껴진다.
자율권 대신 처벌 위주 형사 범죄화, 고부담 고위험 회피기동 발동 의료 붕괴 가속
여하튼 의료계는 무시해도 될만한 소수의 의견 그룹이나 정부 정책에 맞서는 만성적인 반대 단체로 부각,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는 양상이다. 의료계가 합리적인 의견을 사회에 전달하려고 해도 언론 역시 정권의 눈치와 영향을 크게 받는 느낌이다. 정책 실패와 비합리성에 그리고 갈등의 모든 책임은 정책입안자나 정부가 아닌 의료계에 돌려져 있고 정부는 유유히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젊은 미래 의사 세대는 고부담 고위험 회피기동과 필수과목 이탈이라는 수동적이며 새로운 공격적 선택으로 신속히 방향 전환을 하고 있어, ‘의료 붕괴’는 이 시간에도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수치로 정리한 상황판보다 더 심각하고 빠른 속도로 가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