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2월 20일 아침, 불안을 베개 삼아 밀린 잠을 청했습니다. 내과 의사의 삶을 내려놓은 날, 죽음이 다가올 때 스쳐가는 주마등처럼 청진기를 처음 잡은 본과 3학년의 어느 날이 떠올랐습니다.
약 4년전 불편한 새 구두를 신고 맞이한 내과 실습에서 중증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을 앓고 있는 환자분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당시 학생의사 신분으로 의학적으로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환자분을 더 자주 찾아 뵙고, 거친 호흡음에 실린 고충을 진심을 다해 들어드렸습니다. 저의 마음이 깊숙이 환자분께 닿았는지, 실습 마지막 날 환자분께서 “선생님 덕분에 다시 살아갈 의지가 생겼습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세상에 이보다 더 값진 성취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내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고, 감사하게도 아산병원에서 내과 전공의로 수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좋아하는 게 참 많은 사람입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기를 즐기고 탁구를 치는 것도 좋아합니다. 고양이를 포함한 우리 가족도 더 자주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항상 있었습니다. 하지만 돈과 여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수련에 임했기에 포기한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것, 24시간 당직을 서고 남은 12시간의 근무를 위해 새벽에 환자를 보러 가는 것, 청구할 수 없는 야근을 자처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다음날이 되면 잊히는 것들입니다.
내과 전공의로 일한 2년동안 많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이 예견된 환자는 키가 줄어가는 촛불과도 같습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낫게 해야 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지만, 수화기 너머로 희망을 놓지 않는 보호자를 단념하도록 설득했던 순간들은 저와 보호자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습니다. 절멸을 향해 타오르는 불빛을 무기력하게 응시하고 있자면, 환자의 마지막 순간이 망막에 검은 잔상으로 남아 며칠 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할 적에는 환자 활력징후 수치에 따라 울리는 알람 소리와, 보호자의 울음소리가 항상 귓전에 울렸습니다. 야속하지만 너무 급박하게 변하는 환자의 상태, 책을 붙잡고 아무리 고민해봐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병마의 흐름 앞에서 많은 무력감을 느끼며, 고뇌하고, 울었습니다. 당직을 마치고 침대에 몸을 던져 잠을 청하는 순간에는 안도하지만, 이질적인 햇살에 눈을 뜰 적에는 나의 판단으로 환자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88시간으로 제한돼 있는 근무시간에도 불구하고 100시간을 넘게 일해왔던 이유는 이런 불안과 죄책을 떨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장염과 장폐색으로 패혈증이 발현한 환자의 복부 CT 사진을 밤새 쳐다보다가 항문 속 자갈같은 변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변을 손가락으로 끄집어 내니 설사가 2리터 가까이 나와 온몸에 뒤집어썼지만 그 순간을 기점으로 병세는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만 아는 기적 앞에 정말 온몸이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저도 사람이기에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무기력하다고 느낀 날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담당의사를 믿고 기다리는 환자들, 누구보다 근면하고 성실한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저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버텼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독하게 슬프고 기쁘기도 했던 순간들과 지루했던 나날 모두가 소중했고, 저는 내과 의사라는 직업과 환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2월 19일 저녁, 담당하던 환자분들께 사과의 말씀과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두려움과 실망감이 비친 눈빛을 뒤로 하고 2월 20일 새벽, 병원을 에워싼 기자들과 경찰들을 피해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습니다. 가운을 넣기 아쉬운 마음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았다가, 이내 장롱에 넣었습니다. 때가 탄 하얀 네잎클로버가 달린 명찰도 눈에 자꾸 밟혀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서랍에 넣었습니다.
제가 부적처럼 명찰에 달고 다니던 네잎클로버는 황달로 병원을 찾은 고등학생 소녀에게 받은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담도가 구불구불하게 태어나서 잘 막히고, 감염에 취약해져 아마 평생을 병마와 싸워야 할 고등학생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병에 대해 그림을 그려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처방이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뒤 황달이 가라앉은 새하얀 얼굴을 하고서 퇴원한 학생은 며칠 뒤 직접 뜬 네잎클로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저에게는 큰 자랑이자, 내일의 행운을 약속했던 물건을 이제 추억으로 정리합니다. 정책에 대한 논쟁으로 '돈'이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지만, 제가 병원을 떠난 이유가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필수의료 일선에 있는 의사들은 일본의 265배, 영국의 895배에 달하는 기소율을 가진 우리나라의 소송 부담과 만성적인 저수가 문제를 우선 해결해달라고 했지만, 그 어느 쪽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지방에는 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공병원에 대한 투자와 환자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공공의료기관의 비율은 OECD평균 65.5%이지만 우리나라는 5.5%에 불과합니다. 공공병원에 투자할 수 없으면 최소한 환자라도 지역에 있는 병원을 찾아야 의사도 지방에서 근무를 할 것입니다. 중증도와 무관하게 서울의 큰 대학병원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현 상황에도 정부는 의료회송체계를 손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경증 환자들로 인해 대형병원에서는 암이 머리까지 전이돼 의식이 흐려지거나, 척추에 감염이 생겨 언제 하지마비가 올 지 모르는 환자를 2차 병원으로 전원 보내는 기가 차는 상황이 매일매일 발생합니다. 공공병원을 지어 정부 재원으로 투자를 하고, 환자들을 지방의 병원에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는 정책이 선행돼야 지방의료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정부가 의료비 과잉을 문제삼아 밀어붙인 포괄수가제 정책으로 아이를 받는 산과 의사 수는 가파르게 줄었고, 의사들이 반대했던 ‘문재인케어’로 인해 건강보험재정은 더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의료현장에 대한 정부의 진단과 치료는 실패의 반복이었고, 이번 의대 증원과 자칭 필수의료패키지로 불리는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의 의사인력 부족의 근거로 삼은 3개의 논문 저자들은 모두 2000명의 의사 수 증원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한 논문은 미래에 의사 인력이 과잉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담고 있었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소아과를 진료하는 의사 수는 매년 줄고 있습니다. 의사 수를 늘려도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가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현재 상황에 대입해봐도 맞지 않습니다.
결국 앞서 언급한 소송부담의 완화와 의료수가의 정상화가 선행되어야 필수의료로의 의사 유입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패키지에 언급돼 있는 의료사고특례법의 경우 면책의 조건이 까다롭고, 예외조항이 많아 실효성이 없습니다. 또한 필수의료 영역에 대한 금전적 지원 역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으며, 제한된 건강보험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언 발에 오줌누기’식 미봉책일 뿐입니다.
필수의료에 지원하는 의사의 수가 줄어든 것이 문제라면 지원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를 해결하는 것이 정확한 치료일 것입니다. 의사 수 증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출혈 환자의 출혈부위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수혈만 하는 것, 중증 패혈증 환자에게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고 수액만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필수의료의 아사를 방관한 것도 모자라 잘못된 판단으로 일관하며 대화의 의지조차 없이 정책을 강행한 정부에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이런 식의 행정이 반복된다면 필수의료의 침몰은 자명한 상황으로 더 이상의 진료를 포기하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단언컨대, 의사의 봉급이 줄더라도 필수의료와 지방의료를 살릴 수 있는 정책을 추진했다면 저를 포함한 동료들은 진료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 필수적인 신뢰관계가 송두리째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환자는 의사가 선한 의도를 가진다는 사실을 믿기에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것이고, 의사 역시 환자의 믿음을 기반으로 최선의 치료를 약속하게 됩니다. 정부와 언론은 나서서 의사들을 ‘밥그릇을 위해 환자를 버린 양심 없는 사람들’로 비추기에 급급했고 자극적인 보도에 휩쓸린 사람들은 의사들을 비난했습니다. 수조원을 투자해도 살 수 없는 환자-의사 간의 신뢰는 무너졌고, 신뢰를 강물삼아 버텨오던 필수의료의 현장은 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막이 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의사들을 지탱했던 사명감은 형형하게 빛났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빛을 잃어 희미해져만 갑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필수의료를 지원한다는데 왜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는지, 지역의료를 살려야 한다는데 왜 수도권에만 6600병상을 인허가를 냈는지, 회사로 따지면 인턴 격인 전공의가 일을 그만뒀는데 왜 대학병원에서 파산이야기가 나와야 하는지, 자유의 수호와 반-지성주의에 대한 타파를 슬로건으로 태동한 정부는 왜 초헌적인 명령과 사법의 힘을 앞세워 강압적인 행보를 이어가는지 말입니다.
아산병원 내과에서 추구하는 3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에는 일치를
(Unity in essentials.)
그렇지 않은 사안에는 자유를
(Liberty in non-essentials.)
모든 일에는 사랑과 관용을
(Charity in everything.)
의사마다 관점과 치료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결국은 환자의 안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 바탕에는 사랑과 관용이 존재할 것입니다.
정부에 묻습니다. 의대 증원 2000명과 필수의료 패키지를 관철하는 것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젊은 의사들의 자유를 탄압해야 할 중요한 사안인지, 그리고 그 바탕에 국민들의 건강과 대한민국 의료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지금 죄책감과 무력감으로 피가 마르는 심경입니다. 제가 인사를 드린 스무 명의 환자분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셨을 지, 그리고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하는 중한 환자가 있지는 않은 지 매일 걱정합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집단을 힘으로 누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전공의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현안에 대한 걱정으로 다들 잠을 설치고 있으며 파국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병원을 비운 지 벌써 한 달이 흘렀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환자들의 불편과 불신은 가중되고 있기 때문에 초단위로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음을 의사와 정부 모두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전에 했던 주장을 번복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정부는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에 결국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다친 감정을 내려놓고 올바른 정책을 위해 긴 호흡을 갖고 협의에 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칩니다.
-서울아산병원 내과 사직 전공의 백동우 씀
※해당 기고는 전공의 개인 의견이며 전공의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지 않고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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