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와 사랑으로 국민과 함께 한 77년, 천년을 향해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경상북도의사회①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㉔김재왕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 대의원회 의장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올해로 77주년을 맞이한 경상북도의사회는 한강 이남의 의료를 책임지며 경상도 특유의 뚝심과 선비 정신이 어우러져 지금까지 발전해왔다. 1946년 도내 200여 명의 의사가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3400여명의 회원으로 회세가 확장됐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발전에 경북의대 선배님과 동료 후배 의사들의 피땀이 어려있다. 경북의대 100년 역사의 줄기와 함께 성장해온 경상북도의사회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격동과 수난의 시기 경상북도 의사회가 시작되다(1946∼1961)
해방 후부터 1961년까지의 시기는 일제 패망 이후 미 군정 하의 혼란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 전쟁, 4·19 혁명, 제2공화국, 5·16 군사 정변으로 이어지는 수난과 격변의 시기이다.
8·15 해방 이후 의료계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에 발맞춰 경상북도의사회 등 각 시도의사회가 발족됐으나,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큰 혼란을 맞이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비극의 역사가 서구의 수준 높은 의료 기술의 영향이 미치면서 한국 의학에 있어서는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됐다.
경상북도의사회는 1943년 일제 관변 단체로서 조직된 조선인 의사 8명과 일본인 의사 9명으로 발기했으나 조선인 의사로만 구성된 ‘행림구락부’라는 친목 단체가 해방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해방 직후 1946년 경상북도의사회 창립총회를 거치며 박태환 회장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총회에 참석한 박태환, 계용순, 서돈상, 한국원, 손인식 등이 경상북도의사회의 초기 역사를 이끈 주역이다.
1946년 2월 24일은 경상북도의사회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이다. 초대 박태환 회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조선의사협회 대구 지방부 간사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개원 회원의 관리와 기타 의사회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2∼3대 계용순 회장은 1947년 5월 10일 중앙 의사회를 재발족 시키기 위한 전국 대의원 총회가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소집됐을 때 상경한 7명의 대의원 중 한 사람으로서 중앙회 심사위원에 선임돼 활동했으며, 1948년도 대의원 총회 때는 대의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5∼12대 손인식 회장(1950. 5. 1.∼1958. 4. 30, 전신교 제1회 졸업) 제13∼15대 김영근 회장(1958. 5. 1.∼1961. 5. 16, 경북의대 제2회 졸업)
손인식 회장은 8년에 걸쳐 오랫동안 회장직을 수행했는데 재임 당시 쟁점 사항이었던 한지 의사 부활 문제에 대한 반대 활동을 했다. 무의면 해소를 위해 방안을 냈으며 수재 지구에 무료 진료를 하고 성금을 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51년 9월 25일에는 국민의료법이 공포되면서 대한의학협회가 법정 단체로 지정됨에 따라 경상북도의사회도 법정 단체의 지부로 재발족하고 1952년 3월에 제1차 정기 총회를 개최했다. 그 이전에도 매년 정기 총회는 개최해 왔으나 법정 단체 지정 이전의 총회는 정식 차수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1952년 4월 국립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으며 경북대 의과대학이 됐다.
이 시기의 각 회장 및 임원단의 활동 사항들은 기록이 미비해 상세히 밝혀 적기는 힘들다. 이는 당시 해방 직후의 혼란한 시기였던 데다 곧이어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자료가 망실됐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경상북도 의사회의 성장 국민 보건과 의권 옹호에 힘쓰다(1961∼1971)
이 시기 경상북도의사회는 무의면 해소를 위해 노력고 보건관계법에 수반되는 국민 보건과 의권 옹호 문제에서 항상 선두에서 전국 의사회를 이끌었다.
또한 5·16 이후 의사회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의사회의 운영이 이사장 중심제로 바뀌면서 지역 의사회도 지부장, 이사장 체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경상북도의사회도 회장, 부회장의 명칭이 지부장, 이사장으로 바뀌었으나, 회장과 이사장 사이의 불화를 초래하는 등 문제가 대두돼 1966년 임시대의원총회에서 회장 중심제를 골자로 하는 정관 개정안이 확정되면서 이사장 중심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다.
제16∼17대 황용운 지부장(1961. 9. 5.∼1963. 5. 31.)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고, ‘혁명 내각’이 발족하면서 그 포고령에 따라 의협 및 의사회는 사단법인의 인가를 얻지 못해 사실상 해체되는데, 경상북도의사회는 1961년 8월 3일 재건 총회를 개최했고 회칙 수정과 더불어 시·군 의사회도 조직했다. 이후 1961년 9월 2일 대한의학협회가 재건 대의원 대회를 개최함에 따라 3일 후인 9월 5일 김영근 전임 회장과 황용운 신임 지부장이 인수인계를 하며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다.
제18대 송명도 지부장(1963. 6. 1.∼1964. 1. 31, 경북의대 1회 졸업)
1963년은 1962년까지 있던 의사 검정 시험 제도가 없어지면서 의과대학의 중요성이 대두된 시기이다. 이후로 경제의 급성장으로 의료 수요가 증가해 8개의 의과대학이 증설됐고 그 정원 역시 1961년에 비해 2.36배 증가다.
제19대 윤주원 지부(회)장(1964. 2. 1.∼1965. 3. 31.)
대한의학협회가 회기 연도를 5월로, 정기 총회 시기를 4월로 앞당기고 지역 의사회의 명칭을 ‘지부’에서 ‘의사회’로 변경함에 따라 경상북도의사회도 1964년 5월 9일 임시 총회를 열어 정관을 개정하고 임원을 개선했다. 이에 따라 지부장과 이사장의 직함 역시 ‘회장’과 ‘부회장’으로 환원됐다.
또한, 1964년부터 대한의학협회는 의학강좌를 성황리에 개최한 도 의사회를 표창했는데 경상북도의사회가 1965년 4월 22일 의학 강좌를 성료하고 이해 4월 24일 대한의학협회 정기대의원총회에서 표창을 받는다. 올해 대한의사협회 제75차 정기대의원총회에서 7년 연속 모범지부 표창을 받은 것은 이러한 역사에서부터 이어온 전통이 아닐까 싶다.
제20∼21대 김영근 회장(1965. 4. 1.∼1967. 3. 31, 경북의대 2회 졸업)
대한의학협회는 창립 초창기까지 회장단 아래에 부장제로 회무를 집행했으나 1966년부터는 이사제로 바꾸어 기획, 학술, 재무, 법제, 보험, 의무, 정보, 공보 이사 등, 8개 상임이사를 두고 회무를 집행했다. 경상북도의사회도 이를 따랐으며 이사제 형태는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제22∼23대 송명도 회장(1967. 4. 1.∼1969. 3. 31, 경북의대 1회 졸업) 제24∼25대 김종인 회장(1969. 4. 1.∼1971. 3. 31.)
1967년 8월 정부는 영업세법 개정안에 의료 서비스업을 과세 대상으로 삼으면서 파문을 일으켜 의협은 긴급 상임이사회를 열어 반대 투쟁에 나섰다. 이는 곧 전국으로 퍼져나가, 경상북도의사회 역시 9월 4일 임시 총회를 열어 반대를 결의하는 등 전국 1만여 회원들과 각 지역 의사회들이 총궐기하자 정부가 한 발 물러서 영업세 부과 조항의 삭제를 통고하면서 일단락됐다.
1969년도 당시 경상북도의 의사 수는 전국 6,360명 중 914명으로 전체의 14%를 차지했는데 이는 서울의 32% 다음으로 높은 숫자이다. 1969년 9월에는 의료분쟁 조정위원회를 구성했으며, 각 시군의사회에도 지역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경제 성장과 함께 현대 의료의 틀을 갖추다(1971∼1981)
10월 유신을 통한 박정희 정권의 독제 체제가 강화되던 시기이다. 이로 이해 사회적 갈등이 커지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국민의 살림살이가 크게 향상되던 시기였다. 경제 여건의 향상에 따라 전반적인 의료의 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의료법이 전면 개정돼 규제가 강화됐으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현대적인 의료 시스템의 틀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1977년에는 의료보험이 시작됨으로써 국민 의료보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제26대 송명도 회장(1971. 4. 1.∼1972. 3. 31, 경북의대 1회 졸업)
이 당시 자동차 보험은 보험회사가 각 의료 기관들과 개별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자동차 보험 환자의 진료비를 임의로 삭감하고 의료 기관을 일방적으로 지정하거나 취소하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경상북도의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회원들의 자동차 보험증을 반납하고 자동차 보험 회사 측과 여러 차례의 협의를 한 끝에 일괄적인 단체 협약을 체결하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됐던 새마을 운동은 의료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의료계는 새마을 운동의 본뜻에 공감해 무료 진료 사업과 각종 성금 모금 사업에 적극 협조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가지 사회봉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해 지역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또한 1972년 10월에는 이른바 ‘10월 유신’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경상북도의사회도 모든 사회단체가 동참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르기로 하고 이 사업에 협조했다.
경상북도의사회의 정부 시책 협조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의료인이 적극적으로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해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맥이 지금의 해외의료봉사로 이어지고 있으니 봉사와 함께하는 경상북도의사회의 이미지가 이때부터 형성됐다고도 할 수 있겠다.
1972년 3월 25일 열린 제21차 정기대의원총회에서는 개정된 회칙에 따라 처음으로 대의원회 의장과 부의장이 선출됨으로써 경상북도의사회의 대의원회 의장단이 구성됐고 이직제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28대 김윤준 회장(1974. 4. 1.∼1976. 3. 31, 경북의대 제18회 졸업) 제2대 이상성 대의원회 의장(1974. 3. 29.∼1976. 3. 25, 경북의대 제17회 졸업)
오랜 시간을 끌어 오던 의료보험법의 개정과 실시를 앞두고 각종 사설 민간 의료보험 조합이 우후죽순 격으로 난립해 의료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던 시기였다. 의사회에서는 사설 민간 의료보험은 국민 보건 향상과 의권 신장을 저해할 우려가 크므로 개별 계약을 일절 하지 않도록 강력히 촉구했다.
또한 1975년 가을에는 경상북도 의사회장배 쟁탈 친선 테니스 대회가 열렸는데 해당 행사의 성공적인 진행에 힘입어 다음 해부터는 종목과 내용을 더욱 다양하게 편성하고 경북의학제로 명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29대 이상성 회장(1976. 4. 1.∼1979. 3. 31, 경북의대 17회 졸업) 제3대 남용진 대의원회 의장(1976. 3. 26.∼1979. 3. 23, 경북의대 제25회 졸업)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의 말기에 해당하는 기간으로서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적인 실행 덕분에 국민의 살림살이는 크게 좋아지고 있었지만 10월 유신에서 비롯된 장기 집권의 폐해가 노정돼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던 때였다.
1977년 7월 1일부터 500인 이상 단위의 직장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실시됐으며 1979년 1월 1일부터는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 1979년 하반기부터는 300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 적용됨으로써 의료보험 시대가 열리게 됐다. 그러나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지적됐던 저수가 문제는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변함없는 의료계의 숙제다.
한편 1976년 11월 24일 기공식을 가진 대구시의사회관이 1년여의 공사 끝에 1977년 10월 5일 완공됐다. 완성된 건물에는 대구시의사회뿐만 아니라 경상북도의사회도 함께 입주해 사무를 보게 됐으며 2021년 3월 경상북도의사회관의 개관까지 약 45여년 동고동락의 시작이었다.
제30대 이강수 회장(1979. 4. 1.∼1981. 6. 30, 경북의대 18회 졸업) 제4대 김집 대의원회 의장(1979. 3. 24.∼1981. 6. 17, 경북의대 제16회 졸업)
의료계에서는 의료보험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경상북도의사회에서는 의료보험 특별 위원회 및 실행 이사회를 통해 이러한 문제점 들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전개했다. 1979년에는 정부의 의과대학 신설 방침에 따라 영남대학교와 계명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됐다. 이로써 경북 지역에는 기존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과 함께 총 3개의 의과대학이 운영되게 됐다.
경상북도의사회의 새로운 출발(1981∼1991)
1981년도에는 대구시의사회가 분리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조직과 재정의 큰 부분을 담당하던 대구시의사회가 분리돼 나감에 따라 경상북도의사회의 회세는 크게 약화됐으나 새로 구성된 집행부의 노력과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조직은 정비되고 재정은 확충됐다.
제31∼32대 김태수 회장(1981. 7. 1.∼1985. 3. 31.) 제5대∼6대 김용하 대의원회 의장(1981. 6. 19.∼1985. 3. 20)
대구시의사회가 경상북도의사회에서 분리됨에 따라 1981년 6월 19일 임시대의원총회를 개최해 기존 임원진의 사표를 수리하고 임원 보선을 통해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고 회칙을 개정했다.
1981년 12월 31일 공포된 의료법 개정안에서 의료인의 보수 교육을 의무화함으로써 이행하지 않았을 때는 자격이 정지될 수 있었으므로 경상북도의사회는 순회 의사 보수 교육의 실시에 정성을 들였다. 1983년부터는 그동안 해 오던 순회 의사 보수 교육 대신 춘·추계 종합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1984년에는 1980년의 제5회 경북의학제 이후 예산 부족 등의 문제로 열지 못했던 경북의학제를 재개해 추계 학술대회와 함께 열었다.
경상북도의사회의 조직 강화를 위해서 회원의 회비 납부를 독려하고 단합을 호소했으며 자율 정화를 위해 윤리위원회와 의료정화위원회를 구성해 매년 노력했다. 회원의 연수 교육에도 정성을 들여 1984년에 이어 매년 춘·추계 종합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추계학술대회 이후에는 경북의학제를 개최했다. 회원 친선과 건강 증진을 위해 1986년 4월에 제1회 경상북도 의사회장배 회원 친선 골프대회를 대한의학협회의 시·도 대항 회원 친선 골프대회 선수 선발전을 겸해 열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장된 영·호남 지역 간의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영·호남의 의사들이 서로 교류해 의료 현안을 논의하며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경북·전북 의사회가 솔선수범해 친선 행사를 하기로 하고 1987년에 경북의사회가 전북의사회의 임원을 초청해 영·호남 친선 결연을 하고 친선 행사를 가졌으며 이후 매년 정기적인 만남을 가짐으로써 30년 이상 이어지는 친선 교류의 초석을 쌓았다.
체제를 완비하고 단합된 의사회로 거듭나다(1991∼2000)
회원수가 대폭 늘어나고 임원진과 회원이 단합해 노력한 결과 경상북도의사회의 체제가 완비되고 위상이 높아졌다. 경제 성장과 전 국민 의료보험의 실시 등으로 의료의 고급화와 양적 팽창이 일어났으며 의료제도의 정비 과정에 의·약·한방 간에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의사회는 불합리한 의료제도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강제 의약 분업 시행 예고로 의료계는 정부와 갈등을 빚으며 의권 쟁취 투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제35대 이병채 회장(1991. 4. 1.∼1994. 3. 31, 경북의대 27회 졸업) 제9대 남주현 대의원회 의장(1991. 3. 27∼1994. 3. 23, 경북의대 27회 졸업)
이병채 회장 및 집행부는 의사의 신분을 보장하고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보험 수가의 현실화, 심사 기구의 독립, 보험료 체납 진료비의 보험자 징수, 강제 지정제의 계약제로의 전환, 진료비 체납시 가산세 부과 등의 민주적인 의료보험법으로의 개정과 의대 신·증설 저지 등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이를 위해 회원의 참여와 단합을 호소했다. 또한 1994년부터는 가을에 개최하던 경북 의학제를 일조 시간이 긴 봄에 열도록 했다. 1993년 7월에는 경북의사회보가 창간됐다.
1995년 1월 1일부터 경상북도의 10개 시·군이 통합됐고 3월 1일부터는 달성군이 대구시로 편입돼 10시 13군으로 개편됐으므로 의사회도 이에 맞게 직제를 개편했다.
개정된 약사법에 의해 1999년 7월 1일부터 의약 분업의 시행이 결정되자 의학 분업이 가져올 진료 환경과 의사 위상의 변화에 대해 의료계의 불안과 갈등은 커져가고 있었다. 경상북도 의사회는 1999년 11월 23일 정부의 의약분업안을 거부하는 회원 결의 대회를 열었고 이후 11월 30일에는 서울 창충체육관에서 전국에서 3만 명의 의사 회원들이 모인 궐기 대회가 열렸다. 1999년 12월 21일에는 의권 쟁취 투쟁위원회가 조직돼 완전 의약 분업을 위한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됐으며 2000년 1월 8일 임시 대의원 총회를 통해 유성희 대한의사협회장이 물러나고 의권 쟁취 투쟁 위원회가 의약 분업과 관련한 전권을 위임받음으로써 의약 분업 투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댓글보기(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