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학교육평가원 윤태영 부원장 연구팀 "일제강점기 이래 급조된 제도들 의학교육 발전 걸림돌" 지적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국내 의학교육 발전을 위해 일제강점기 이래 급조된 관련 제도들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특히 의사국가시험 합격 직후 바로 독립진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의사국시 필기시험 고정 합격 기준도 손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윤태영 부원장(경희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연구팀은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발주로 진행한 ‘의과대학 교육 현황 파악을 위한 연구’에서 “의학교육이 체계화되고 선진화된 반면 제도나 법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 같이 밝혔다.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직후 급하게 만들어진 법령∙제도들이 현재 국내 보건의료 및 의학교육 맥락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국내 의학교육 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적 장애물로 ▲의대 졸업시점에 부여하는 독립진료 자격 ▲의사국가시험 필기시험의 고정 합격선 ▲의사양성의 특수성이 인정되지 않는 획일화된 입학선발 정책 ▲의예과와 의학과의 학제 단절 ▲경직된 의무 수업시수 ▲교육병원의 부족한 임상실습 여건 등을 꼽았다.
국시 합격 후 독립진료 허용 바람직하지 않아...일정기간 전공의 수련 후 허용 등 대안
연구팀은 먼저 의대를 졸업하고 면허시험에 합격하면 바로 독립진료를 허용하는 현행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홍콩 등은 상급자의 지도감독 없이 독립진료 자격을 부여하는 시기를 최소 1년 이상의 기본 수련을 마친 후로 잡고 있다. 전공의의 경우 해당 수련기관 내에서만 상급 전공의가 됐을 때 일부 업무에서 지도감독 없이 독립진료가 가능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의료법상 의대 졸업 후 면허시험에 합격하면 독립진료라 가능하며, 인턴수련이라 해도 장소 및 상급자의 지도감독 여부와 무관하게 독립진료를 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에 따라서 우리나라 의대에서는 졸업생이 지도감독 없이 독립진료를 할 수준으로 교육시켜야 하며 이는 종종 외국의 경우 전공의 과정에서 학습하는 지식과 술기 및 태도 영역까지 포함하게 된다”며 “그 결과 교육해야 하는 내용의 수준이 높아지고 양이 증가하며 의사국시에서 요구하는 수준도 높아진다”고 했다.
이어 “70년 전 의사가 부족한 시대가 아닌 21세기임에도 여전히 의대 졸업직후 독립진료를 허용하는 제도는 윤리, 전문직업성, 환자안전, 사회적 책무성 관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 및 국시원은 의학교육계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과 논의해 환자안전 관점과 현실 맥락을 고려한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구체적 대안으로는 졸업시 의사면허를 수여하고 일정 기간 이상의 전공의 수련 후 독립진료면허를 수여하는 방법들이 거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사국시 총점 60% 고정 합격선∙획일화 된 입학선발 정책 문제
현재 총점의 60%인 의사국시 필기시험 고정 합격기준도 언급했다. 연구팀은 60점을 고정 합격선으로 한 현행 제도는 학술적∙합리적 근거가 미비하며, 학생들이 추후 전공의 시절 배워도 될 지식까지 미리 과도하게 공부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험의 난이도가 합격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돼 의사 수급에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짚었다.
이에 합격선을 매년 유동적으로 가져가고, 시험 합격 결정 심의 권한을 국시원 산하 의사시험위원회 등에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연구팀은 합리적 합격선 설정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준거지향적 합격점 설정방법, 특히 Angoff 방법이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변호사 시험합격자 결정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변호사시험 관리위원회에 법적 심의 권한을 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연구팀은 “실기시험에 합격선 설정을 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우리나라 의학교육계는 합격선 설정 방법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상태”라며 “현실 맥락에 맞게 합격 결정 사항도 법적 제도 개선을 복지부가 관심을 갖고 진행하길 기대한다”고 했다.
연구팀은 의사양성의 특수성을 고려치 않은 획일화된 입학선발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과 계열 고등학생에게 유리한 입시정책, 최근까지 이어져 온 지역인재 선발 금지, 필기시험 및 성적 위주의 학생 선발 등이 환자와 소통이나 사회에 대한 통찰있는 학생, 지역사회에 남을 학생 등을 선발할 기회를 놓치는 형태로 작동했고, 학생의 좋은 의사로서의 자질 및 인성을 평가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현재 의과대학은 소속 대학의 입학선발 정책의 영향을 받게 되며, 의대 특수성을 고려한 입학선발 정책을 별도로 갖기 어렵다”며 “입학선발에서부터 환자와 사회를 배려하는 학생을 뽑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환자와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지역인재전형을 확대하는 정부의 방침은 바람직하다. 다만 그 어떤 입시정책을 하더라도 취약계층이 의대에 입학해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좋은 의사가 되는 데는 그 갈 길이 멀다”고 꼬집었다.
연구팀은 또한 보건복지부에 “의대 입학선발과 학생 지원이 단지 교육부의 업무일 뿐 아니라, 의사양성정책의 시작으로 복지부의 소관이기도 함을 인지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정책 지원에 나서줄 것을 주문했다.
의예과∙의학과 2+4 학제∙경직된 의무수업시수가 다양한 교육 어렵게 해
의예과와 의학과의 학제 단절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의예과∙의학과 2+4 학제로 인해 의사 양성을 위해 중요한 의예과 기간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도 지난 1973년 의예과 의학과의 법적 구분을 없앴으며, 전 세계적으로 이 같은 제도를 가진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
연구팀은 “의사 양성의 시작은 의학과부터가 아니라 대학에 입학하는 시점인 의예과 과정에서 부터”라며 “하지만 각 대학은 의학과부터 의사 교육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의예과에 교양 위주의 교육과정을 대학의 경직된 틀에 따라 편성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각 대학이 사명과 졸업성과에 따라 자율적 교육과정 편성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의회와 한국의학교육협의회를 중심으로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직된 의무 수업시수도 환자와 사회를 위한 의사 양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현행 고등교육법 시행령은 대학의 교수시간을 매 학년도 30주, 매주 9시간으로 명시하고 있다.
학교의 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교수시간을 다르게 정할 수 있지만 정부의 각종 평가나 재정지원사업을 염두에 둬야하는 대학 입장에서는 대학평가를 의대만 별도로 정하는 것이 사업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물론 번거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의학교육은 전문직업성, 환자안전, 사회적 책무성 관점에서 강의를 지양하고 통합교육, 소그룹토의, 환자와 만남 등을 확대 강화하는 추세지만 이러한 수업들이 대부분 수업시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팀은 “의사양성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의 교수학습은 환자와 사회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보건복지부도 수업시수와 관련해 관심을 갖게 제도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육병원 실습 여건 미비...적극적 실습 참여 위해 법률 개정 등 필요
의대생들이 임상실습을 하는 교육병원의 여건과 환경이 열악하다는 점도 짚었다. 연구팀은 “일제강점기 의학교육의 폐해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임상실습 문제”라며 “임상실습 강화는 환자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나 아직 의사가 아닌 학생이 병원에서 환자진료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특히 의대생은 실습을 위해 지도교수의 지도감독을 받아야 하며, 의무기록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현행 법률과 달리 현장에서는 전공의, 전임의의 지도감독을 받는 경우도 많고 환자진료에 함께 참여하며 의무기록도 확인하고 있어, 학생의 임상실습 행위가 법률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연구팀은 “교육적 목적의 임상실습에서 학생참여를 허용하는 법률 개정이 절실하며, 진료역량을 갖춘 학생에게 실습면허를 부여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며 “복지부는 의대 및 교육병원과 함께 학생들이 법적 문제없이 적극적으로 환자진료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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