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2.05.26 05:42최종 업데이트 22.05.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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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교수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이유 "다음 세대는 더 나은 이어달리기를 할 수 있다는 희망"

[의대생 인턴기자의 선배의사 인터뷰]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재난 피해자, 소방공무원, 군인, 경찰, 의료진 등 안전과 건강을 위해"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김승섭 교수는 "앞의 세대가 최선을 다해 달려줬던 것만큼 우리는 더 나은 달리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온라인 인터뷰 캡처 

[메디게이트뉴스 이혜준 인턴기자 이화의대 본4] 의사 출신 연구자가 사회 문제에 깊숙히 관심을 가지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끊임없는 연구를 통한 학술 논문과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면 실제 학문과 현실의 차이를 좁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보건학자인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김승섭 교수가 바로 그런 연구자다. 김 교수는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지워싱턴대 보건대학원 강사를 거쳐 고려대 보건과학대 보건정책관리학부와 보건과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김 교수는 결혼이주여성, 성소수자,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재소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가족,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천안함 생존장병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2017년 9월 '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8년 12월 '우리 몸이 세계라면', 2020년 11월 '장애의 역사' 번역서, 2022년 2월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등 4권의 책을 펴냈다. 

김 교수는 연구자로서 자신이 사회 문제에서 역할을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역사의 이어달리기 속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지언정 앞에서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달렸던 바통을 이어받고 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바통은 머지않아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것이다"라며 "앞의 세대가 최선을 다해 달려줬던 것만큼 우리는 더 나은 달리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내가 했던 연구들 중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재난 피해자 등 사실 어떤 문제도 충분한 관심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이어달리기를 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라며 "요즘 특히 관심 있는 것은 '시민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의 안전과 건강'이다. 의료진도 포함되고 군인, 경찰, 소방공무원도 포함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사회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이 가장 차갑고 열악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막상 그들의 건강과 안전은 사회가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라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다음은 김 교수와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회적 약자의 건강에 대한 연구, 그리고  4권의 책과 관련한 일문일답이다.  

네 권의 저서와 번역서 통해 연구와 사회의 연결고리, 그리고 이야기 통로 

-2017년에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첫 책으로 냈다.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보건학자로 대중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인가. 

오래 전부터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박사 공부를 시작하고부터는 학술적인 연구 중에서 세상에 알려지면 유용하고 유의미한 내용이 많이 있는데, 논문과 현실의 차이가 크다고 느꼈다. 논문의 세계는 따로 있었고 현실은 멀리에 있었다. 그래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연구들을 잘 읽고 소화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고민이 있었다. 

소방공무원, 쌍용자동차, 세월호 생존학생, 성소수자 등 연구를 하면서 이런 예민한 문제를 직접 겪으면서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학자로서 이야기할 통로가 필요해 언론에 기고를 했다.

즉 첫째는 학술 논문을 대중들에게 적절하게 소개하는 것, 둘째는 내가 실제로 연구를 하며 느꼈던 고민을 대중에게 글로 써보이는 것, 연구와 현실 사이의 갭(gap)을 좁히고 싶어 그동안 두 가지를 꾸준히 했다. 꾸준히 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모여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대중서를 펴냈다.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글을 쓰다보니 어느 순간 모였던 게 아닐까 싶다.
 
-저서인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학문의 전반을 설명해주는 교양 강의 느낌을 받았다면 이번에 새로 나온 책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특정 연구에 대한 보고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 단독저서에서 특정한 연구를 책 주제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학술논문은 길게 쓰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학술논문은 정확성을 추구하고 연구결과를 보여주고 그에 적합한 배경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과정으로 쓰여진다. 그러나 대중에게 쓰는 글은 한 호흡에 써야한다. 글을 쓰는 사람조차 한 호흡에 써내지 못하는데, 읽는 사람이 절대 그 호흡을 따라올 리가 없다.

자신의 논리적 힘, 지적인 역량을 포함해 사람마다 한 호흡에 가닿을 수 있는 분량이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쓰던 시기까지는 내가 한 호흡에 가닿을 수 있는 원고지 매수 분량이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40매 정도였다. 계속 공부를 하며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쓸 때는 100매 정도까지 늘었다. 그러면서 계속 고민했던 것은 현실의 많은 문제들이 가까이 들여다 보면 그냥 '잘못됐다, 부조리하다'고 말하기에는 훨씬 복잡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깊게 들여다보면서 분석하면서 비판하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인문사회학적 맥락을 설명하는 것들이 필요하다. 학자로서 한 주제로 800매짜리 대중서를 써내고 싶었고, 그러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있었다.

현실의 많은 문제가 칼로 끊고 자르듯이 한달음에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깊이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하고,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이해하고 복잡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한 주제를 두고 긴 호흡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학자가 되는 게 나에게 중요한 목적이었고 대중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 킴 닐슨의 '장애의 역사'를 번역한 것에 대해 더 나은 연구자가 되고픈 사적인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외국 저서를 읽고 공부하는 것과 번역하며 공부하는 것에서 어떤 차이를 경험했나.

우선 번역이 훨씬 힘들다. 번역은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장애의 역사'같은 책을 번역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장애학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닌데 심지어 미국의 장애의 역사에 대해 쓴 책을 나에게 번역하게 했던 것이다. 스스로 그 번역에 도전하게 했던 중요한 이유는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 즉 열심히 바닥에서부터 일해서 올라가면 홀로 성공해 낼 수 있다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개인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강한 나라라는 데 있다.

미국은 'Independence'에 대한 찬양이 있는 나라다. '장애의 역사'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Independence(독립)가 아니라 Interdependence(상호의존)이라고 말한다. 그 사회에서 장애의 정의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왔고, 장애인들은 낙인과 편견에 어떻게 싸우며 세상을 바꿔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보고 있으면 한 사회가 말하는 능력있는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인간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사회와 구성원들은 모두에게 같은 류의 대접을 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오랜기간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고 흑인은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시대별로 인간, 시민의 범주는 항상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이런 내용을 검토하면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능력있는 인간, 혹은 능력주의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지점에서 질문할 수 있고,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 번역했다.

번역은 이 책을 한국사회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국 문장은 나의 책임이다. 원저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원저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해 확인해야만 한국사회에서 그 단어에 적합한 번역어가 무엇인지, 그 문장에 상응하는 의미를 담은 한국어 문장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내 몸을 저자의 위치에 놓고 글을 바라보는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이번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주로 천안함 생존장병의 주제를 다뤘다. 이 책을 펴낸 목표는 무엇인가.  

이번 책을 쓸 때 목표 중 하나가 '천안함 생존장병'이라는 주제 하나로 책 한권을 한 호흡에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돼보는 것이었다. 쓰는 과정이야 나눠쓰고 고치고 다시 쓰는 것을 반복하지만, 작가인 나의 입장에서는 한 호흡에 따라가려는 목표가 있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욕망, 그럴 수 있는 학자로서의 능력을 갖추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또 하나는 이 책으로 천안함 생존장병 사건 자체가 생존장병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넘어 생존장병의 시간이 한국사의 가장 구석진 부분을 바라보는 좋은 렌즈가 돼준다고 생각했다. 군대 안에서의 능력있는 몸에 대한 신화와 그 규정된 몸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낙인 등을 잘 보여줄 수 있고, 군대 안에서 정신질환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보기에도 좋다. 세월호 참사와 함께 봤을 때 한국사회에서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고, 소방공무원과 같이 생각해본다면 일하다 다친 사람들로서 생존장병을 바라볼 수도 있다.

천안함 생존장병을 통해 바라보는 한국사회를 논함으로써 천안함 사건을 보다 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보다 잘 이야기한다'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는 최소한 책 한권이 필요한 일이었다. 
 
-세월호, 천안함 생존 피해자 뿐만 아니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연구를 해오면서 책에도 상당수 다뤘다. 사회의 여러 현상 중 연구 주제는 어떻게 정하는지 궁금하다.

독립된 연구자가 존재하고 수많은 연구주제가 앞에 있고 그 중 하나를 고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말하는 사람에게도 개인의 역사가 있고, 연구자가 속한 학계에도 학계의 역사와 정치적-경제적 배경이 있다. 연구를 하려는 세계에도 나름의 규칙과 역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연구주제를 선택한다기보다는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절박하다고 생각하는 질문들 중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연구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종종 하나의 연구주제가 다음 연구주제를 가지고 오기도 한다. 천안함 생존장병에 대한 연구도 세월호 생존학생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 나오는 연구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사회역학과 트라우마는 뗄 수 없는 관계일까. 

그렇지는 않지만 책에서 천안함 생존장병, 소방공무원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다보니 트라우마를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간이 자신의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한 상처를 입게 되는 트라우마의 경험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됐다. 

특히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트라우마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소방공무원과 천안함 생존장병의 트라우마라는 건 직업병이기도 하고, 나는 사회역학을 하기도 하지만 서울대에서는 특히 산업보건연구자, 노동자건강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번 책에서 단원고 전 스쿨닥터 김은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사회역학과 임상의학이 맞닿는 지점 같아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연구를 통해 임상의학이 병원 뿐 아니라 사회에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나. 

의과대학 교육에서 보여주지 않고 있을 뿐이지, 훌륭한 의사, 간호사들이 정말 많다.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또 고통받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이 내용이 흔히 말하는 '의학 교육'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어달리기를 하는 다음 세대 사람들은 더 나은 질문과 조건에서 싸우고 공부할 수 있다면
 
-연구를 통해 사회적 문제가 수면 위로 대중들의 관심이 커지게 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나. 

직접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가 2014년에 진행했던 연구 중 전공의 근무 환경 조사는 전공의 특별법이 통과될 때 중요한 근거 자료로 사용됐다. 소방공무원의 근무환경에 대한 인권위원회 연구도 소방공무원의 인력 충원 등 여러 문제를 바꾸는 근거 자료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항상 문제 해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과학적 분석과 바람직한 변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변화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합쳐졌을 때 가능하다. 다만 나는 연구자이기에 논문과 책으로써 그 변화에 기여하려는 것 뿐이다.
 
-대중들이 잘 모르고 있어서 관심이 커졌으면 하거나, 혹은 관심을 두고 있는 사회적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사회의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 내가 했던 연구들 중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재난 피해자, 소방공무원 등 사실 어떤 문제도 충분한 관심을 받고 있지는 않다. 내가 요즘 특히 관심 있는 것은 '시민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의 안전과 건강'이다. 의료진도 포함되고 군인, 경찰, 소방공무원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국 사회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이 가장 차갑고 열악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막상 그들의 건강과 안전은 사회가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사회적 이슈와 긴밀히 호흡하는 시기라고 느낀다. 과학계, 문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사회를 돌아보려는 시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사회문제에 대한 구성원들의 태도에 변화가 있다고 보나. 

물론 한국사회가 이뤄낸 성취를 폄하해서는 안되지만,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가 눈에 먼저 들어오지는 않는다. 분명 사회는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도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믿고 싶다. 내가 하고 있는 연구에서는 지금 당장 삶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한국 사회가 좋아졌다는 말은 쉽게 입에 담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쉽게 바뀌지 않을 것들에 대해 투쟁하고 목소리를 낸다. 때로는 자신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에도 그렇다. 타인의 고통을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또 그것을 자기의 싸움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글쎄, 나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그렇게 별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나보다 더 뜨겁게 온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다. 다만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 글을 쓰고 발언하는 사람이라는 자리 때문에 내가 더 드러나는 것 뿐이다. 또한 내 앞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무대가 있기에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과 1980년대에만 해도 한국 사회에선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하지 않았는가.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사회과학 서적을 가지고 있으면 잡혀가는 나라였다. 1990년대 후반에 대학에 들어간 나는 상대적으로 제약없이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앞의 사람들이 쌓아왔던 무대 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역사의 이어달리기 속에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지언정 앞에서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달렸던 바통을 이어받고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통은 머지않아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것이다. 앞의 세대가 최선을 다해 달려줬던 것만큼 우리는 더 나은 달리기를 할 수 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어달리기 속에서 내가 달리는 구간 동안에 내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 앞의 세대가 감당해 낸 시간으로 인해 내가 더 나은 공부를 하고 더 나은 형태의 사회 변화를 추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어달리기를 하는 다음 세대 사람들은 더 나은 질문과 조건에서 싸우고 공부할 수 있으면 한다.
 
-사회적 약자의 삶에 관심이 많지만 가끔씩 스스로의 마음이 도덕적 허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괴롭기도 하다. 혹시 비슷한 고민을 한 경험은 없을지 궁금하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건 허영 아닐까. 이건 명예욕 아닐까. 이건 자기만족 아닐까' 그 질문들을 놓은 적은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보면 꼭 필요하고 해야 할 일이 분명하다 보니, 그 속에서 나의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다. 순수하게 나를 다 바쳐 사회적 변화와 진보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지적인 허영, 공부에 대한 욕심 혹은 좋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 등이 혼재돼 있는 상태다. 자기만족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애쓰는 과정에서 내가 계속 분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바라봐준다면 가장 좋은 칭찬이 아닐까 한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진심으로 품고 있다면 분명히 어느 시점에는 기회가 온다. 그 기회는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문제일 수도 있고, 마음을 조금만 내주면 일상의 아주 작은 지점에서 개인의 구체적 아픔을 도울 수도 있다. 무엇이 더 뛰어나고 훌륭한지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나은 방식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다. 그것들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신이 공부했던 것들을 연구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할 수 있길"
 
-현재 하고 있는 공부와 연구에 있어 의학 전공이 영향을 미치고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나.


의학 공부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됐고 좋은 일이었다. 사회적 조건, 근무환경, 가정환경 등이 인간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인간 몸에서 벌어지는 생리학적 변화를 거쳐야만 질병이 발생한다. 이는 의학의 영역이다. 사회적 조건이 어떻게 피부 안에 스며드는지에 있어서 의학은 나에게 중요한 백그라운드이자 힘이 되어주는 공부다.
 
-혹시 다음 책에 대한 계획이 따로 있다면 소개해달라. 

책에 대해서 마음 속에는 여러 계획이 있지만 아직 모르겠다. 고려대에서 9년을 근무하고 올해 3월 서울대로 옮겼다. 서울대로 오면서 산업보건, 노동자 건강 문제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일단 앞으로 3년 정도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어느 시점에 대중서든 학술서든 무언가 말하고 싶고, 또 말할 수 있을만큼 내 안에 내용이 차 있다고 생각된는 시기가 온다면 또다시 책쓰기를 시작하지 않을까 한다. 

-그동안 여러 연구를 오래 해오면서 공동체의 모습에서 절망을 더 많이 느꼈나. 혹은 그럼에도 희망을 봤나.

세상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상상보다 훨씬 다채롭다. 그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해야할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나라는 사람을 무대 밖에 놓고 평론가로서 본다면 무언가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연구자로서는 나 역시 그 무대 위의 사람이다. 희망이나 절망을 생각한다기보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힘겹게 한발짝씩 내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중이다.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앞으로 특별한 소망이 있다면.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이 연구한 것의 일부나마 사회로 환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하는 연구들이 연구자 개인의 능력과 돈만으로 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연구에 국민의 세금이 직간접적으로 들어가 있고 한국사회의 인프라 위에서 연구를 진행한다. 연구자가 개인의 이름으로 논문이나 보고서를 발표하지만, 실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논문 작성이 가능하다. 당장 대학이 진행하는 평가에 반영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연구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할 수 있도록 서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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