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회 유진홍 교수 "자연 발생설 유력하지만 예단 금물…과학에 정치 개입 시 희생자는 진실뿐 아니라 우리 자신"
백악관은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실험실에서 개발돼 누출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진=백악관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백악관이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져 누출된 것이라고 발표한 데 대해 국내 의학계에서 비판이 제기됐다.
대한의학회 저널 JKMS 유진홍 편집장(부천성모병원 감염내과)은 지난 22일 JKMS 사설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는 데 정치적 고려가 개입했거나, 그렇게 보일 여지가 있단 점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백악관의 발표를 비판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은 여전히 명확히 규명된 바 없는데 백악관이 정치적인 이유로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유 편집장에 따르면 가장 널리 지지받는 가설은 자연 발생설이다. 바이러스가 동물 간에 전파되며 변이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됐다는 것이다.
유 편집장은 “해당 가설은 다양한 유전체 분석과 진화생물학적 연구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박쥐와 천산갑 등의 숙주 사이에서 일어난 재조합을 통한 적응 과정을 보여주는 구체적 증거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초기 폐쇄적 대응으로 실험실 유출설·생물학 무기설 등 부추겨
두 번째는 실험실 유출설이다. 실제 최초 발병지인 중국 우한 소재의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일하는 일부 연구원이 초기에 코로나19 유사 증상을 보였으며, 쉬정리 박사팀이 고위험 바이러스 실험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는 점 등이 개연성을 더한다.
하지만 유 편집장은 “해당 실험에서 사용한 바이러스는 완전한 감염성 입자들이 아니라, 복제 능력이 없는 유전자 서열 기반의 합성 바이러스였다”며 “인간 세포 침투 여부를 시험하는 유사 바이러스 실험도 복제 능력은 없었다. 쉬정리 박사는 해당 바이러스가 연구소와 무관하다고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고 했다.
끝으로 중국 정부가 생물학 무기로 제작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유 편집장은 이에 대해서도 “여러 이유로 과학적 신뢰성이 결여돼 있다. 특히 생물학 무기 개발 시 기본 원칙은 자국민 보호를 위한 백신과 해독제를 사전 확보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중국은 팬데믹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정부가 자국을 치명적 위협에 처하게 하는 행동을 고의로 했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다만 유 편집장은 실험실 유출설, 생물학 무기설 등도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각종 음모론의 원인을 제공한 게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기 중국 정부는 정보 은폐, 핵심 데이터 늑장 공개, 내부 의료 전문가 발언 억압 등으로 중국 당국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며 “이런 점이 실험실 유출설이나 고의 조작설의 확산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록 자연 기원설이 과학적으로는 더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만약 결정적 사실이 은폐됐다면 현재의 유력 이론조차 붕괴될 수 있다”며 “다만 이런 회의론은 과학적 추론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근거 없는 주장과는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백악관, 충분한 과학적 증거 없이 정치적 고려로 발표…반과학적 압력에 맞설 용기 가져야
이에 유 편집장은 백악관의 최근 발표가 과학의 핵심 원칙을 위배한 사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유 편집장은 “핵심 원칙은 어떤 가설이든 충분한 과학적 증거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확신해선 안 된다는 것”이라며 “백악관의 최근 발표는 이런 원칙을 심각하게 위배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과학적 불확실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국가 정부가 정치적으로 유리한 가설을 공식 채택하는 건 학문의 자유와 진리 탐구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과학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할 때 그 여파는 전 세계 과학계와 감염병 전문가들에게까지 미친다”며 “이같은 발표는 사람들의 불신을 야기하고, 바이러스 기원에 대해 사실 기반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까지 공격 대상이 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유 편집장은 “지금 필요한 건 성급한 결론이 아니라 끈질긴 질문과 근거 중심의 철저한 분석”이라며 “이럴 때일수록 과학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고 반과학적인 압력에 맞설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감염병 전문가들이 지켜야 할 원칙으로 ▲동료평가를 거친 근거 바탕의 과학적 논의 ▲기원 이론의 불확실성 인정 및 정치적 의도 개입된 해석에 신중 ▲경쟁 가설에 대한 열린 토론 장려 ▲대중과 소통 시 균형 잡힌 정보와 과학적 근거 기반 설명 제공 등을 제시했다.
끝으로 “과학은 질문으로 시작해 증거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며 “이 여정에 정치가 끼어들면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고, 두 번째 희생자는 우리 자신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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