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명 이하'냐 '1000명 이상'이냐...이필수 회장이 의대정원 '협상'에 무게를 둔 이유
실용주의 노선으로 투쟁보단 협상에 초점...실제 의대정원 증원 규모에 따라 내부 평가 엇갈릴 듯
[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의대정원 확대 문제를 놓고 대한의사협회의 강경한 목소리가 사라졌다. 의협 이필수 회장이 최근 공식석상에서 투쟁 대신 협상을 강조하는 발언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것이다. 국민 여론 80%가 의대정원 확대에 찬성하는 상황에서 강경 투쟁이 강조될수록 의협의 이미지가 손상되고 파업 명분이 적다는 이필수 회장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의협 집행부의 실리 노선이 의료계 내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지 여부는 의대정원 규모가 확정되면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는 증원 규모를 0명에서 350명 선으로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는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증원을 못박고 있어서다.
범대위 출범 이후 의협 집행부 '투쟁' 보단 '협상'에 초점
의협 이필수 회장은 지난해 11월 집행부 산하 '범의료계대책특별위원회(범대위)'를 출범시킬 때까지만 해도 파업까지 시사하며 강경한 투쟁 의지를 보여왔다. 정부가 40개 의과대학 대상 정원 확대 수요조사를 진행하고 2000~3000명에 이르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데 따른 반대 급부였다.
당시 이 회장은 삭발을 감행하고 파업 찬반 투표까지 실시하는 등 정부를 향해 날을 세웠다. 이 회장은 "이제는 의대정원 증원 저지를 위해 전 의료계가 단일대오로 적극적 행동을 시작할 때"라고 강경투쟁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12월 의협 대의원회 임시총회에서부터 "투쟁과 협상을 병행해야 한다"며 다소 완화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이 회장은 "의협은 협상과 투쟁을 조화롭게 병행함으로써 회원들의 권익을 지켜나가고 국민과 회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대의원들은 임총 투표에서 6표 차이로 이필수 회장 집행부의 범대위 존속을 승인했다. 그 이후 이필수 회장 발언은 조금 더 협상과 실리 쪽으로 무게추가 이동했다.
올해 1월 4일 의료계 단체들의 신년 비전과 목표를 세우는 신년하례식에서도 이필수 회장은 투쟁 대신 정부와의 협의를 강조했다.
이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의료계와 정부가 모두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충분한 논의를 통해 합의하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 과정에서 유연하고 합리적 자세로 협의에 임하겠다"고 했다.
이필수 회장의 순화된 어조는 '정부 규탄 집회'에서도 이어졌다. 1월 26일 대통령실 앞에서 진행된 제1차 정부 의대정원 증원 졸속추진 강력 규탄집회에서 이 회장은 협상과 소통을 우선순위에 뒀다. 이날 발언에는 '불가피하게 의대정원이 늘어난다면'이라는 전제도 달았다.
그는 "불가피하게 의대정원을 늘리더라도 늘어난 인력이 지역필수의료 분야로 유입될 수 있는 합리적 제도가 선행돼야 한다"며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정책을 도출하기 위해 의료현안협의체 등을 통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진정성 있는 논의와 소통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일부 의대정원 증원 허용하더라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이 같은 발언 수위 조절은 의대정원 문제를 둘러싼 현 의협 집행부의 현실적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책 실현을 위한 정부 의지가 강한 만큼 의대정원 증원을 막지 못한다면 일부 증원을 허용하더라도 실효성 있는 정책 대안을 담보하자는 것이다. 만약 최종적으로 의학계 주장대로 의대정원 확대 규모가 350명선으로 결정되면 이필수 회장에겐 적절한 선에서 막았다는 명분까지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이필수 회장은 차기 회장 선거에서 충분히 재선까지 노려볼 수 있다.
특히 의대정원 확대 규모를 최소한으로 방어하면서 의료계 숙원사업이었던 의료분쟁특례법이나 지역필수의료 수가 개선 등이 현실화되면 이필수 회장의 대응이 '최고'는 아니지만 '차선'으로 평가될 여지도 있다. 해당 정책들 모두 이필수 회장 취임 시기부터 역점 사업이었던 공약이다.
일부 관계자들은 의협의 대정부 발언 수위가 대폭 완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필수 회장 개인 성향이 일부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이 회장은 대립과 갈등보단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던 인물이다. 즉 의대정원 문제로 정부와 일부 표면적인 갈등은 어쩔 수 없으나 대학병원 분원 확대 저지, 수가 개선, 의사 형사처벌 부담 완화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은 만큼 서로 최대한 갈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언행은 삼가한다는 것이다.
의협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의협은 의료정책 당사자로 의사 권익만을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이필수 회장은 취임 때부터 줄곧 의협을 의사만을 위한 이기적 집단이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최고 전문가 단체로서 바로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필수 회장이 취하고 있는 실리 노선은 내부 회원들에게도 일부 어필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국민 여론이 80% 이상이 의대정원 확대를 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경 투쟁이 오히려 의협 이미지에 좋지 않고 파업 명분도 적기 때문이다.
의협 대의원회 한 관계자는 "국민 정서를 고려했을 때 이필수 회장이 파업에 대한 언급을 조심하는 듯하다"며 "공공의대 설립이 함께 부각됐던 지난 2020년과 달리 지역필수의료 문제를 꾸준히 상기시키며 의대정원 확대 명분을 쌓았던 정부에 대항하기에 파업 명분이 부족하다고 판단도 내려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협 서정성 총무이사는 "의협이 처음부터 '증원은 절대 안 된다. 무조건 0명으로 막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의협이 그런 집단은 아니다"라며 "증원을 하더라도 충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증원 규모를 최소화시키면서 지역필수의료 개선이 제대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둑 무너지면 전체 제방 무너지는 것 한순간" 내부 비판도 여전
한편으론 의협 집행부의 애매모호한 입장을 두고 의료계 내부 비판도 만만치 않다. 대다수 의사 회원들은 의대정원을 단 한 명이라도 늘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범대위 내부에서도 의대정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 의협 집행부가 내부적으로 큰 호응을 얻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이필수 회장과 집행부에 대한 의료계 민심은 하락 중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임시총회에서 대의원들은 이필수 회장 집행부 산하 범대위를 존속시키도록 뜻을 모으긴 했지만 새로운 비상대책위원회를 요구하는 대의원들도 46.3%에 달했다. 지난 7월 임총에서 별도 비대위 설치 찬성표가 20% 남짓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필수 회장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여론이 25.1%p나 줄어든 셈이다.
또한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단체휴학과 파업 등 강경책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협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는 지적도 덩달아 나오고 있다.
다른 의협 대의원은 "이필수 회장이 의대정원 문제에 있어 실리를 추구했다는 명분으로 회원들에게 일부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결과는 3월 차기 회장 선거에서 봐야겠지만 현재로선 이필수 회장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편"이라며 "이대로 의대정원 증원이 확정되면 차기 선거에서 이필수 회장에겐 매우 불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수지의 둑이 한 곳에서 무너지면 제방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의대정원이 확대되면 지역필수 의료인력 통제 수단으로 지역의사제 통과가 유력해질 수 있다"라며 "전쟁을 하기도 전에 장수가 전투를 회피하고 화친을 도모하는 꼴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의료계는 투쟁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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