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IT 기업 '팔란티어' 로고. /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지난 2011년 5월 새벽 파키스탄. 미 중앙정보국(CIA)이 주관한 '넵튠스피어' 작전을 통해 미군은 국제 테럴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무수히 많은 점조직으로 이뤄진 알카에다 구성원 가운데 빈라덴을 찾아내는 일은 모래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에 가까웠다. CIA는 당시 한 기업의 힘을 빌려 빈라덴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 기업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1세대 투자자 중 한 명인 피터 틸이 창업한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회사' 팔란티어다.
◆정보기관 위한 IT 기업, 팔란티어
팔란티어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테러와 범죄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미국 IT 기업이다. 국제 통화 결제 데이터에서 테러조직의 자금줄을 추적할 수 있는 툴인 '고담', 금융 관련 범죄를 분석하는 '메트로폴리스' 등이 주력 상품이다.
각종 고지능 범죄와 테러 조직 추적이 주 업무이다 보니, 팔란티어는 미국 CIA, 영국 비밀정보국(SIS) 등 전세계 정보기관과 주로 사업을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 거래내역과 고객정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기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팔란티어는 미국의 투자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는 회사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한 이후, 아크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를 이끄는 캐시 우드 CEO가 이 회사에 크게 베팅해 주목 받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사업 구상…데이터 세계 뚫어보는 '천리안' 꿈꾸다
팔란티어의 창업자는 실리콘밸리 기업인으로 유명한 피터 틸이다. 틸은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리는 인물들 가운데 한명이기도하다.
팔란티어 창업자이자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 일원인 피터 틸. / 사진=연합뉴스
페이팔 마피아는 지난 2002년 미국의 전자결제 기업 '페이팔'을 '이베이'에 매각하면서 큰 돈을 벌어들인 창립 멤버들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실리콘밸리 내에서 여러 스타트업들을 창업하면서 미국 IT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경영인들로 거듭났다. 틸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페이팔 마피아로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있다.
머스크가 테슬라를 통해 전기차·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혁신에 집중하고 있다면, 틸은 좀 더 안보적인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틸이 팔란티어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지난 2001년 벌어진 9.11 테러다. 그의 자서전 '피터 틸'에 따르면 당시 틸은 테러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2001년 9월11일(현지시간) 비행기 테러로 인해 미국 뉴욕 쌍둥이빌딩이 불에 타는 모습. 9.11 테러는 피터 틸의 팔란티어 창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 사진=연합뉴스
특히 틸을 가장 염려케 한 것은 안보 목적으로 통과된 여러 규제와 법안들이었다. 틸은 자서전에서 "9.11 테러가 벌어진 바로 그날 온갖 가혹한 규제의 문이 열리고 말았다"며 "그래서 나는 제2의 9.11이나, 그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테러 등 국가 안보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틸이 내놓은 해답이 바로 데이터 분석이다. 그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미래의 위협을 정확하게 예측하면, 국가에 소속된 수사·관료기관이 보다 합법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비전에 따라 틸은 지난 2003년, 자신의 자본과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아 팔란티어를 설립했다.
팔란티어는 J.R.R. 톨킨의 유명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신비한 도구 '팔란티르'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진은 반지의 제왕 영화 속에 등장한 팔란티르. / 사진=유튜브 캡처
팔란티어는 J.R.R. 톨킨의 유명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의 도구 '팔란티르'에서 따온 이름이다. 작중 팔란티르는 아무리 멀리 있는 사물이라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는데, 틸은 정보기관이 팔란티어의 기술력을 현명하게 사용해 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라들의 위협도 쉽게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랬다.
팔란티어의 소프트웨어는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유용성을 입증했다. 지난 2011년에는 9.11 테러 주동자로 파악되는 빈라덴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보기관을 넘어 일반 기업에서도 팔란티어의 기술력이 도입되고 있다. 팔란티어가 내놓은 민간용 데이터 분석 툴인 '파운드리'는 항공기 제조업체 에어버스, 글로벌 석유 대기업인 BP 등과 계약을 체결했다. 파운드리는 항공기 운항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공정, 품질관리, 유지보수 효율성을 높이거나 기업 경영 구조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팔란티어의 민간용 데이터 분석 툴 '파운드리'는 에어버스, BP 등 민간 대기업들에게도 유용성을 인정 받았다. / 사진=팔란티어 공식 홈페이지 캡처
코로나19가 뒤흔들었던 지난해에는 미 보건복지부(HHS)와 손잡고 코로나19 모니터링 시스템 '티베리우스'를 개발했다. 티베리우스는 기저질환 환자, 노인, 의료보험 가입자 수 등을 파악해 백신 우선 배포 지역을 결정하거나, 방역에 유용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다.
◆"경쟁은 필패…살아남으려면 독점하라" 틸의 성공론
상업성보다는 국가 안보를 중요시하고, 민간 시장보다는 국가 기관과의 계약을 통해 성장해 온 팔란티어는 일반적인 IT 기업과는 구별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이같은 팔란티어의 특성이야말로 창업자 틸의 경영 전략이다.
틸은 지난 2016년 5월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해밀턴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의 경영 철학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당시 틸은 "경쟁(competition)은 패배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대신 독점(monopoly) 시장을 만들어라"라고 주장했다.
틸에 따르면, 경쟁은 다른 회사가 쉽게 베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하는 기업가들이 벌이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회사들은 한정된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수익을 깎으며 다툴 수밖에 없고, 결국 다른 경쟁자에게 흡수 당하거나 서로 자멸하게 된다.
대신 정말로 번창하는 기업을 만들려면 자신만의 독점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성공론이다. 작지만 아직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사업을 개척하면서, 시장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회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을 위한 IT 기업'이라는, 이전에는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사업을 통해 글로벌 빅데이터 회사로 성장한 팔란티어처럼 말이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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