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추행한 회사 임원을 고소한 후 집단 왕따를 당했다. 회사는 가해자와 한편이었다."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사건은 드러내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지위가 낮은 여성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최근 S제약 임원을 형사고소한 A씨(28세) 역시 지난 해 9월 입사한 수습 영업사원이다.
일개 수습사원인 그녀가 지난 3월 말 자신의 상사인 임원 B씨를 성추행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고작 20대 후반의 여성이 회사와 임원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한 것일까?
서울 용산구 모처에서 A씨를 만났다.
A씨는 사건 발생 상황과 B씨, 회사와의 면담 녹취록을 하나하나 기록해 보관하고 있었다.
형사고소를 처음 해 본 그가 우왕좌왕하다 혹여 실수를 할까, 놓치는 게 없을까 겁이 나서였다.
그의 아픈 기록을 쫒아가봤다.
A씨가 S제약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해 9월이다.
그 때 S제약 영업부에 입사했다.
제약 관련 경력이 있던 그는 마케팅 PM(Product Manager)이 되고 싶었고, PM이 되기 위해 영업사원 경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A씨는 입사 후 연수교육에서 동기 중 1등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불미스런 사건은 지난 3월 2일 회식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B씨가 계속 옆자리에 앉으라고 불렀고, 마지못해 옆자리로 갔다.
B씨는 "마케팅 부서에 공석이 하나 났는데 오고 싶지. 나한테 잘 보여야 해"라며 허세를 부렸다.
B씨는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A씨의 머리와 얼굴에 손이 갔고, 흠칫 놀라 옆으로 피해 앉았다.
그러자 B씨는 그 때부터 짐승으로 돌변했다.
노골적으로 허리를 감싸려는 듯 다가와 다시 피했다.
그는 회식이 마무리될 때 쯤 되자 "열심히 하라" 악수를 청했다.
A씨가 악수를 하려는 순간 그는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로 내 손등에 키스하라"고 요구했다.
손을 빼려고 안감힘을 써봤지만 B씨는 "키스해, 키스해!"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A씨의 손등에 두 번이나 강제로 입을 맞췄다.
많은 직원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A씨는 그냥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성폭력 상담센터와 법률사무소를 찾아다녔고, 지난 3월 5일 S사 인사과에 면담을 요청했다.
그 자리에서 A씨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 내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전에도 B씨가 여직원들에게 성적인 모욕감을 줬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B씨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A씨는 B씨에게 △전체 직원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 △홈페이지에 공식 사과문 게재 △B씨의 업무실 장소를 옮기거나 종합병원 사업부 업무실 위치 변경 △형식적인 성교육이 아닌 성교육전문가의 정기적인 교육 마련 등의 이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B씨는 이를 거부했다.
겉으로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척했지만 "그날 술에 많이 취해 딸인 것으로 착각했다"거나 "공식 사과를 하면 회장님이 알게 된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후 간부급 직원들이 B씨에게 퇴직을 권고하는 등 문제가 커지자 B씨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S제약은 B씨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대신 징계위원회는 B씨에게 '정직 1개월'과 '전직원 대상 사과문 발송'이라는 징계를 내렸다.
"S제약은 임원이 4명밖에 없는데 징계위원회 위원이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성의없는 사과문과 정직 기간 교양도서나 읽으라는 솜방망이 처분에 너무 화가 났다. 한달 후면 다시 B씨와 계속 마주치면서 후폭풍을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닌가. 회사가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A씨는 끝내 B씨를 고소했다.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S제약은 오히려 A씨의 담당 부서 및 영업지역을 바꿨다.
A씨는 여성 MR로는 이례적으로 '종합병원사업부'를 맡고 있었는데, 부서를 '의약사업부'로 발령했다.
B씨와 같은 층에 근무하면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강남, 건국대 입구, 구리 등을 맡았던 영업지역은 경기도 광주와 하남으로 바뀌었다.
"팀과 담당 지역을 바꾼 건 고객을 바꾼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집단 왕따도 이 때쯤부터 시작됐다.
"마치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었던 것처럼 한 사람씩 돌아가며 큰 소리로 망신을 줬다.
한 상사는 "고소해 놓고 뻔뻔하게 회사에 나오느냐"며 큰 소리로 화를 내는가 하면, "또 나왔네. 출근 계속 할거냐?"며 비꼬는 선배도 많았다.
한 번은 아무런 상관없는 부서의 상사가 오더니 "선배들이 너 때문에 피해를 본다"면서 많은 직원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윗선에서 내가 스스로 나가게끔 만드는 시나리오를 짰고 몇몇 직원들이 눈에 띄게 이행하는 것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새로 발령받은 팀에서도 온몸으로 냉대를 느껴야 했다.
"지점장이 직원들에게 나와 얘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난 '그림자' 취급을 받았다. 바로 옆자리의 동기도 나와 인사하지 않았다."
A씨는 버티다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출근을 하다가 공황장애 증상을 심하게 느껴 휴가를 요청했지만 핀잔만 들었다. 상사와 면담했지만 휴가 요청을 받아주지 않아 5월 6일부터 나가지 않고 있다."
A씨는 사건 초기만 해도 일이 이렇게 확대될지 예상치 못했다고 털어놨다.
B씨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피해자에 대한 회사 차원의 배려를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회사가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직 1개월간 교양도서나 읽으라는 징계를 내리더니 피해자인 나에겐 부서 변경과 같은 가혹한 조치를 잇따라 내렸다. 고소를 했다는 이유로 고용상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회사 내규와 전혀 다른 후폭풍이었다. 부모님과 상의 후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됐다."
한편, S제약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담당 직원은 "사실과 다르게 보도된 내용이 많아 명예훼손으로 대응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형사 고소 중인 사건이라 지금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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