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선거가 내년 3월 9일로 다가왔습니다. 각 후보캠프들이 여러 단체들로부터 정책 제안을 받아 대선 공약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는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짚어야 하는 보건의료정책 어젠다(agenda)를 사전에 심도 있게 살펴보고 이를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의료계 전현직 리더들의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의료계가 각종 악법에 대한 방어에만 급급할 게 아니라, 선제적으로 꼭 필요한 정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메디게이트뉴스] 1987년 가을,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서울대 광장에 소위 양김(兩金)씨가 와서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먼저 단상에 오른 한 사람은 당시 정부의 반민주적인 실정(失政)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다음에 올라간 사람은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한 자기의 비전을 제시했다. 누가 학생들에게 더 큰 호응을 얻었을까.
첫 연자의 얘기는 당시 현안이긴 했지만, 광장에 모인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였고, 그나마도 비판에 치중했을 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 두 번째 연자는 민주화와 대선 정국에 가려 자칫 간과되기 쉬운 주제를 다루었으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호응을 얻었다.
시간이 흘러 두 연자는 모두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임기를 마쳤지만,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는데 있어 그 방식이 위의 연설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공과(功過)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는 있겠으나.
이렇듯 사람 간의 대화는 물론이고 조직이나 단체 간의 소통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일방적으로 하느냐 아니면 상대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느냐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영혼 없이 비위만 맞추라는 건 아니다. 다만 상대가 잘 모르는 얘기나 주요 관심사에 대해 얘기를 해줘야 주의도 환기시키고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난 2000년 의약분업 투쟁을 계기로 의료계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이후 네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그 때마다 의료계가 각 대선 캠프에 적극적으로 보건의료정책을 제안했지만, 그 결과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의료수가 현실화나 의약분업 재검토, 동등한 요양급여계약제도, 의료분쟁특례법, 의료전달체계 확립이나 일차의료, 필수의료 살리기 등 우리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의료제도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어젠다들이었다. 하지만 각 대선 캠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선거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만 들이킨 꼴이다.
그렇다면 대선 때마다 왜 번번이 의료계의 제안이 거부당했고, 정성껏 만든 제안서가 후보가 한번 펼쳐보기도 전에 쓰레기통으로 가게 됐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전반적인 정서가 의사들과 사뭇 다른 정당은 물론이고 그나마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되는 정당도 그래왔는지 말이다.
우리만의 정신승리는 이제 그만
본디 선거란 이기기 위한 그리고 이겨야 하는 게임이다. 더욱이 정권을 다투는 대통령선거는 여야 모두 목숨 걸고 싸우는 전쟁이고, 아마추어 스포츠경기처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는 통하지 않는다.
각 대선캠프에서 요구하는 것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득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다. 물론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계의 제 단체들은 학술적이거나 공익적인 면모가 없지 않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익단체다. 따라서 이익단체가 제시하는 정책이란 아무래도 소속 회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데 주안점이 있고, 따라서 정부나 국민, 여타 이익단체들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상호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선거에 도움이 되는 보건의료정책을 만들고 제시할 수 있다. 단지 제안만 할 게 아니라 캠프에 직접 참여하면서 구체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사실 대통령선거에 참여하는 건 대선 기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하나의 대선이 끝나면 그 다음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지난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후보가 박근혜후보를 누르고 후보로 결정됐을 때 거기서 비중 있게 참여했던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이 “이명박 후보가 본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높으니, 의사들은 이명박 후보를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셔서 내가 대답했다. “이명박 후보는 의사들이 있으나 없으나 당선될 거라고 자신할 텐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더구나 의사들은 어차피 대부분 한나라당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의사들이 대선에 참여해서 뭔가 제대로 얻어내고자 한다면, 지금부터 박근혜 후보에게 사람들이 가서 5년 간 갈고 닦아야 합니다. 또 패배가 유력한 민주당에도 가서 일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바뀌어도 국회에서 여야는 비슷한 의석을 차지할 테고, 국정을 운영하고 법을 만드는 데는 야당의 힘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힘들 때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라고 덧붙였다.
허나 지금까지 필자의 이런 의견을 귀담아 듣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5년 마다 돌아오는 대선은 물론이고,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도 의료계는 자기만 중요하고 나만 알 수 있는 말을 되풀이했고 돌아오는 메아리조차 없었다. 선거 때마다 각종 보건의료 정책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갖다 주지만, 뭔가 열심히 했다는 자기만족일 따름이었다. 일종의 ‘졌잘싸’ 같은 합리화 기제랄까.
메아리 없는 구호보다 정치세력화에 힘써야
사실 의사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열심히 진료하고 봉사해도 기득권층으로 항상 지탄받고, 아무리 좋은 의견을 내도 직역 이기주의로 매도당하곤 한다. 의약분업을 비롯해 의사들이 문제 있다고 지적했던 정책들은 오히려 국민에게 아주 좋은 것처럼 선전됐다가 결과가 나쁘게 나와도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의료의 전문가인 의사들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통행으로 밀어붙이다 좌초하는 것을 수도 없이 봤으니 더 이상 뭐라고 얘기하기도 귀찮아진다. 그 단적인 예가 작년부터 창궐해 온 나라를 재난적 위기로 빠져들게 만든 코로나 사태의 대응 실패가 아닌가.
그럼에도 의사들은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의사들이 침묵하면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정말 자기들이 잘 하고 있는 줄 착각하면서 더욱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릴 수 있는 기회가 각종 선거, 특히 정권이 바뀔 수 있는 대통령선거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만의 화법이 아니라, 상대가 잘 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해줘야 한다. 상대가 궁금해 하는 것을 얘기해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사의 권익적인 사안은 잠시 뒤로 미루고, 효율적인 방역체계의 확립이라든지 저출산·고령화 기조에 따라 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큰 틀의 개혁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의사의 정치세력화다. 여태껏 의사들의 선거 참여는 전체 의사들의 권익 향상보다는 정치권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의료단체의 회장이나 임원 등 일부 의사들의 사리사욕에 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는 설령 정치권으로 진출한다고 해도 의사들보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게 되므로,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의사단체 자체가 힘을 길러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중요한 사회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의학적 원칙에 충실한 의견을 서슴지 않고 내놓아야 한다. 비단 선거철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양질의 보건의료정책을 생산해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정당에 직접 참여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요컨대, 의사의 합리적인 정치세력화가 가장 효과적인 선거 참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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