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영어단어 ‘community’는 흔히 ‘지역사회’로 번역돼 일상에 활용된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보면 그 의미는 모호해진다. 학술적 의미에서 지역사회는 지리적 의미(주민과 조직의 활동 범위에 기반)와 기능적 의미(행정적 분할, 동질성, 공통의 욕구 충족 등)로 나눠볼 수 있다.
기능적 의미의 지역사회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집단 구성원의 상호 의존성과 고유한 특성을 강조한다. 지역 필수의사제도는 지역사회 내에서 주민의 의료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법인데, 얼마 전 이주영 국회의원이 지적했듯이 지역이란 단어와 지역 필수 의료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법안이 제정됐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지역’에 과연 어떤 의료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목표인지, 어떤 의사가 배치돼야 하는지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최근 회자되는 통합 돌봄과 소아와 노인 주치의 제도 등 고령화 시대에서 지역사회 의료의 실천은 전문가와 비전문가, 공공과 민간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지역사회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는 ‘지역 의료’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기본 요소다. 최근에 열리는 토론회나 포럼에서는 지역 의료를 위한 거버넌스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관심을 끈다. 비록 지역의 범위가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역사회는 지리적·기능적 특성을 바탕으로 주민의 삶과 질 향상과 공동체 의식을 실현하는 중요한 사회적 단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 특정 지역이 아닌 철저한 타당성 조사로 ‘지역 의료’ 형성
프랑스에는 우리의 ‘지역 의료’와 고령화 사회에 대한 ‘통합 돌봄’이 합쳐진 용어라 할 수 있는 ‘Les communautés professionnelles territoriales de santé(CPTS)’가 있다. 영어로 표기하면, Territorial Pluriprofessional Health Community인데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지역의 다학제적 의료커뮤니티’라는 명칭으로 지역 의료에 대한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특정 행정 구역의 논리보다는 다양한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능적이고 역동적인 환경 조성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프랑스의 CPTS는 특정 행정 구역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요구, 그리고 환자 흐름을 추적하는 진단 방식을 통해 해당 구역에 대한 일종의 타당성 조사로 지역 의료의 프랑스 모델인 MSP(다학제 건강센터)를 설립한다.
MSP 설립을 위한 지역 선정은 ARS(지역 보건 기관) 또는 자치단체가 일반적으로 인구 통계, 보건 시스템, 그리고 지역 계획 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의료 인구 통계인 일반의, 간호사, 전문의의 밀도, 예상 은퇴자 수(지역 의사 연령 피라미드), 우선 개입 또는 현재 자원 부족 지역, 혹은 예상 지역, 전체 인구 규모 및 추세(증가 또는 감소), 연령 구조, 사회경제적 취약성(저소득, 농촌 고립), 접근성/이동 시간, 가장 가까운 지역의 일반의, 병원 또는 응급 서비스까지의 거리 및 이동 시간, 대중교통 이용 가능성, 기존 인프라 구축 현황, 잠재적 파트너(약국, 물리치료사, 치과 의사, 간호사)의 존재 여부와 합리적인 비용으로 리모델링이 가능한 토지 또는 건물 확보 가능성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가 지역 선정의 기준이 된다.
MSP 지역 선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활권(Bassin de Vie)’의 개념이다. 프랑스 재경부 산하 통계와 경제연구 기구인 L'Institut national de la statistique et des études économiques(INSEE)에 따르면, 생활권은 주민들이 주요 시설 및 서비스(교육, 보건, 상점, 고용)를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지역을 의미한다. 즉, 건강 계획 수립 시, 생활권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일하고, 진료받는 실제 생활 공간인 기능적 집수 구역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MSP 설립은 단순한 공동체가 아닌, 일관된 생활 공간의 일부로 제공돼야 한다. 그래야 환자 유입량이 충분해 전문가들이 재정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고, 전문가들이 너무 분산되지 않고 다학제간 활동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MSP는 인구가 적절한 거리(일반적으로 20~30분) 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생활권을 활용하면 다학제 팀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작거나 고립된 공동체에 막대한 시설을 건설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다학제적 생활권 기반 프랑스식 지역 의료 vs 명칭뿐인 K-지역 의료
주 건강보험 기금(CPAM)과 지역 보건국(ARS)은 MSP 설립 의향이 있는 의사를 최대한 지원하기 위해 MSP 설립 활용에 도구와 자원을 소개하고, 설립 자문 역할을 맡는다. 설립 의향이 있는 의사가 설립 실행 방식을 설명하는 의향서를 제출하면 ARS로부터 건강 프로젝트 개발을 위한 재정과 필요한 운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필요한 경우 건강보험(일반 및 농업 보험)과 ARS는 지역 내 다른 의료 전문가들에게도 해당 프로젝트를 홍보하거나 행사지원에 나서기도 한다.
의사들에게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일이 때로는 용이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프랑스 건강보험(Assurance Maladie)과 지역 보건국(ARS)은 프로젝트 대상 지역 인구에 대한 통계 및 진단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매핑(mapping) 도구를 활용해 지역 평가를 개발하고 대상 지역의 이용 가능한 모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은 프랑스 건강보험(Assurance Maladie)에서 개발한 온라인 도구인 ‘Rézone CPTS’ 계정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 도구의 데이터는 전문가, 기관, 보험 가입자 등 누구나 열람할 수 있고 인구, 질병 유병률, 암 검진율, 지역 의료 서비스 등이 망라돼 있다. 이러한 지표를 활용해 선택된 지역의 건강 요구와 과제에 가장 적합하게 프로젝트를 조정할 수 있다.
만일 어려움이 생기면 프랑스 건강보험(Assurance Maladie)에서는 ‘프로젝트 액셀러레이터’라는 보다 구체적인 지원 방법을 제공하여 접근 방식을 더욱 체계화하고 관련 프로젝트를 공식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건강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즉시 다음 프로세스로 지역보건국의 승인(수신 후 2개월 후 암묵적 승인) 후 장기 기금 지원을 받는다. 취약지의 MSP 설립자에게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인센티브가 제공된다. 우리나라처럼 법으로 지역 배치를 강제하기보다는 각종 혜택을 부여해 지역으로의 자발적인 유입을 유도하는 정책이다.
지역보건국은 MSP 설립 타당성 조사를 위해 최대 3만 5000유로의 자금도 지원한다. 선정된 지역에서는 MSP가 특수 외래 의료법인(Société Interprofessionnelle de Soins Ambulatoires, SISA)의 자격 요건을 갖추어 최소 2명의 일반의와 1명의 준 의료 인력, 그리고 기타 인력을 충족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꼼꼼한 설계가 필요한 의료 정책 그렇잖으면 ‘본헤드 폴리시’로 전락
정치권에서는 종종 MSP가 필요한 의사 수를 유지하거나, 유치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ARS는 제안된 부지가 특정 지역사회의 ‘위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활권 단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지를 확인해 조정한다. 즉 ‘정치적 결정’이 아닌 ‘정책적 합당성’을 중요시해 실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시골에서 주민 1200명 규모의 ‘지역 A’와 8km 정도 떨어진 주민 2000명 거주 ‘지역 B’ 모두 MSP를 원하더라도, ARS는 두 지역보다는 6000여 명 정도가 거주하는 ‘생활권(Basin de vie) 지역’을 더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다시 말해 약국, 학교, 대형 마트 등이 들어서 있는 적정 규모의 접근이 수월한 중앙 지역에 MSP를 건설하는 것을 타당하고 합리적인 결정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 의료’를 논하면서 지역 의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지역 의사의 역할은 무엇인지도 불명확한 상태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의료계를 맹공하며 법과 제도로 밀어붙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지는 지역의 필수 의료는 그 실체와 형상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