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의료재앙이 일어난 발화지점은 전공의들이였다. 작년 2월 의대증원을 계기로 촉발된 전공의 사직, 학생 휴학, 의료붕괴, 윤석열정권의 계엄선포와 탄핵, 정권교체, 의대증원 철회, 그 후 올 9월 학생들과 전공의들이 복귀하면서 사태가 일단락 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없고 상황이 더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대한민국 의료는 2024년 2월 이전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큰 희생을 치른 젊은 의사, 학생, 전공의들이 의료계의 암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태로 인하여 국민, 의사, 특히 전공의와 학생들 모두가 루저가 됐다.
정치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몰두하며 의료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두고 지엽적인 문제들만 건드리고 있다. 이들은 반성은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필수의료, 지역의료를 말살시키고 응급실 뺑뺑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최악의 법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국민은 병에 걸릴 경우 제대로 치료 받기 어려워 질까 불안에 떨고 있고, 업무에 복귀한 전공의들도 더욱 꼬여버린 상황에 불만에 차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전공의 수련제도의 문제점들이 곪아 터진 것이 이번 의료대란을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련제도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대한민국 의료는 파멸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 같이 심각한데 이를 고치려는 사람이나 반성하는 집단은 없고 의료계는 고질적인 문제들만 가지고 정부와 싸우는 것도 버겁다. 무엇보다도 수련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수련의 질, 의료의 질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고 결국 우리나라 미래 의료의 총체적 부실의 불씨가 될 것은 분명하다.
전공의 모집 숫자를 병원 경영에 필요한 숫자대로 뽑으면 안 된다.
수련 후 분야별로 사회에서 필요한 숫자만큼 전공의를 뽑아야 한다. 지금처럼 각 수련병원이 운영에 필요한 숫자대로 전공의를 뽑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들이 수련을 끝낸 후 배운 전공을 살려서 일할 수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해 전공과 무관한 분야의 일을 하면서 불만이 쌓이는 것이다.
심장흉부외과 전문의의 82%, 외과의 52%가 전공과 무관한 분야의 의료를 하고 있다는 통계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고용된 전공의들이 값싼 노동력, 연구보조, 잡일하는 심부름꾼 취급받는 일부 수련병원 때문에 전공의가 교수를 ‘중간 착취자’라고 부르는 충격적인 일까지 벌어지게 됐다.
전공의 수련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각과의 전공의 교육 프로그램도 일반적인 진료가 가능한 수준까지만 하고 개원가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전공의들이 수련 마친 후 병원에서 봉직의로 또는 개원해서 활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분야들, 예를 들면 소아심장수술, 췌장이식, 간이식, 부정맥 절제술, 심장이식 같은 세부전문 분야의 ‘뒷치닥꺼리’에 전공의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전임의fellow나 교수의 할일이다.
전공의가 온갖 잡일만 하다가 수련 끝난 후 맹장수술도 못하고 디스크 수술도 못하고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진료를 하게 되면서 원망과 불신이 커지는 것이다.
모든 과에서 전공의 수련시간, 수련기간의 일률적인 단축도 문제이다.
전공의를 근로자로 보고 노동법에 따라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근무 시 초과수당을 줘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보고 많은 수련병원 원장들과 교수들이 패닉에 빠질 것으로 짐작된다. 주 40시간이면 월~금요일까지 일주일에 5일간 오전 9시 출근~오후 5시 퇴근인데, 게다가 이제는 소아과, 내과, 등 여러 과의 수련 기간이 3년으로 줄었는데 배워야 할 것은 날로 많아지는데, 과연 어떻게, 어디까지 가르칠 것인가? 3년 수련 마친 후 전문의가 된 후 의료의 질은 어떨까?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모든 전공 과목의 수련 기간이 똑같다는 점이다. 전문과 특성에 따라 2년이면 충분하다고 판단되는 분야도 있을 것이고 수련기간이 훨씬 더 길어야 하는 과도 있다. 예를 들면 외과 중에서도 심장외과, 소아심장외과, 심장부정맥 절제술, 이식 외과, 뇌혈관 수술 같은 분야는 수련기간이 훨씬 더 길어야 한다. 물론 펠로우 제도로 세부전문 분야의 수련을 하고 있지만 과 마다 수련기간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의대 졸업 후 수련 없이 곧 바로 개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의대 졸업 후 곧바로 개원하는 경향이 점차 높아지는 것 같다. 의대 증원 여파로 당분간 몇 년 간은 의대 교육 자체가 부실해 질 것이 우려되는 와중에 졸업 후 수련조차 받지 않고 개원하는 의사들이 많아진다는 사실, 그리고 복귀한 전공의들도 수련을 중단하고 취직이나 개원 하는 숫자가 늘어난다는 사실 등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의료의 질 전체가 낮아질 것이 우려된다. 모든 의사들이 전문의, 세부전문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의대 졸업 후 아무런 수련 없이 곧바로 환자 진료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심장흉부외과 수련 프로그램
미국의 심장흉부외과(cardio-thoracic surgery CTS) 수련제도(전공의와 세부전공 전임의 포함)를 살펴보자. 외과 전공의 레지던트 5년, 그리고 이 5년에 포함되지 않는 연구년(research year)을 추가로 1~2년(권장 사항), CTS 펠로우 1~2년, 이를 모두 합하면 의대 졸업 후 최소한 7~9년이 지나야 CTS 전문의가 된다.
나아가 선천성·소아심장외과 전문의가 되려면 이 분야 펠로우를 1~2년 더 해야 한다. 선천성심장병 분야는 환자수가 많지 않은 특수 분야라 전공을 살리려면 대학병원에서 근무해야 하므로 교수자리가 날때까지 수련을 계속하며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의대 졸업 후 최소한 7~9년 지나야 CTS 전문의가 되고, 8~11년 지나야 선천성·소아심장외과 교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CTS는 수가가 높고 의사 수입도 상대적으로 높다. (지금 일부 미국 대학병원에서는 integrated program으로 외과와 흉부외과 합해서 짧게 6년 하는 곳도 있다.)
이런 특수 분야는 수련 프로그램 자체도 많지 않아서 외과 레지던트 끝난 후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수련을 마친 후에는 대부분 대학교수로 취직이 된다. 우리나라처럼 다른 분야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수련 프로그램의 자격평가 심사도 아주 엄격해서 유명 의대 부속병원에서 소아심장 수술 수련 프로그램이 취소된 일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CTS 전문의가 된 이후 소아 수술과 달리, 성인 수술인 경우 대학병원이나 수련병원이 아닌 일반 대형병원에서 전공의 없이 수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련 끝 내고 직업 선택의 폭이 훨씬 넓다. 이 점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외국의 의사면허제도, 전문의 수련제도, 의료전달체계
미국은 주마다 면허 제도가 다르지만 의사면허 시험 합격 후 수련을 받아야 면허를 준다. 그런데 이 제도가 주 마다 조금씩 달라서 일부 주에서는 졸업 후 수련 없이 면허시험에만 합격하면 의사면허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의사면허가 있더라도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개업이나 취직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어텐딩(attending) 제도 때문인데 전문의 자격이 없으면 자기 환자를 병원에 입원 시킬 자격(hospital admitting previlege)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문의 자격이 없으면 보험회사에서 아예 수술을 허락하지 않거나 수술 후에라도 의사가 청구한 진료비, 수술비를 지급하지 않는다. 즉 보험회사가 의사와 병원의 질 관리를 하는 셈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미국 의대 졸업생들은 졸업 후 개인마다 다르지만 짧든 길든 수련과정을 거친다.
미국은 전공의 수련 기간이 과 마다 조금씩 다르다. 내과는 3년인 경우가 많고(세부전문 외과가 아닌) 일반외과는 기본으로 5~7년이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는 과 별로 수련기간이 다르며 의대 졸업 후 최소한의 수련을 받고 개원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한다. 의대 졸업 후 아무런 수련을 받지 않고 개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국은 의대 졸업 후 인턴 1년을 해야 의사 면허를 준다. 그 후 일부는 일반의(general practioner GP)로 활동하며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다. 국민은 일차로 GP의 진료를 받고 GP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면 전문의에게 진료를 의뢰한다. 처음부터 환자가 원한다고 전문의 진료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비싼 사보험을 가진 부자의 경우는 다르지만).
독일도 영국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처음부더 전문의, 또는 환자가 원하는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없다. 일차의료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전문의에게 보낸 환자는 일차 의사가 정해준 전문의와 지정 병원에만 갈 수 있다. 우리나라 처럼 환자 마음대로 전문의나 병원을 골라서 갈 수 없다.
이와 같이 의료전달 시스템의 통제권을 미국은 사보험회사가 갖고 영국, 독일은 정부가 가진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환자의 선택권이 무제한이다. 이 부분도 개선돼야 우리나라 의료가 지속가능하게 된다.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의료가 지속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