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와 역경으로 점철된 나의 의사 인생기
알칸사 주립의대 내과 과장님과 함께
올해로 북미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살기 시작한 지 7년이 된다.
메디게이트뉴스에서 보잘 것 없는 나의 의사 인생기와 컬럼을 실어주신다니 너무 감사드리고 또한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북미의 의료 환경, 수가 정책 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동안 내가 겪고 살아왔던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한 줄로 표현하자면 실패와 역경으로 이어진 세월이라고 말하고 싶다. 후회와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고3을 앞둔 1992년 1월이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과 친하게 지내던 어떤 아주머니네 큰아들이 Y의대에 입학했다고 해서 나도 막연히 의사가 되고 싶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국영수 잘하고 내신 1등급에 들고 암기과목 잘하면 의대 입학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모의고사를 통해서 자신의 예상점수에 맞는 의대에 지원에서 약간의 운과 함께 좋은 학력고사 성적이 전부였던 때.
고3이 시작되고 3월 첫째주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의대에 지원하겠노라고 말씀드리고 그저 공부만 했었다.
1년 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의대 입학할 수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그러던 중 8월 캐나다 이민 비자가 나왔고 10월 2일 학교를 자퇴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되었다.
담임과 교감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이민을 강행했고 그 때부터 나의 고생 아닌 고생이 시작되었다.
2010년 9월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미국 가정의학과 학회장에서
주입식 암기식 위주의 공부에 익숙하던 나는 캐나다 고등학교 12학년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적응을 잘 한 편은 아니었다.
영어는 항상 C 학점이었고 작문은 항상 F 를 간신히 면했으며 화학, 생물은 주관식 문제에 매우 취약했다.
그나마 수학 성적이 가장 좋았으나 그것도 간혹 정답만 적어내고 풀이 과정은 부실하게 제출하여 감점을 맞은 적도 많았다.
어찌어찌 이듬 해 1993년 6월 고등학교 졸업은 하였으나 대학 입학은 난관이었다.
캐나다에서의 11학년 (우리나라 고등학교 2학년) 성적이 없으니 입학에 어려움을 겪었고 UBC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교)에 간신히 입학했다. 그것도 지원 성적 커트라인이 비교적 낮은, 문과로 입학하였다.
물론 나의 대학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항상 졸업과 함께 의대에 가야한다는 절대절명의 위기감 속에서 4년을 보내야만 했다. 각종 동아리 활동이나 취미 활동은 지속성을 가지지 못했다.
이 점이 지금 와서는 가장 후회되지만.
나는 내가 미국 하버드의대 쯤은 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크나큰 착각이었고 오산이었으며 과대망상이었다.
지원했던 39곳의 미국 의대에 보기 좋게 모두 불합격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라 모두 편지를 통해 불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97년 가을 겨울은 날아드는 불합격 편지에 나날이 우울해 하던 나의 젊은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스펙'을 쌓고자 원하지 않던 대학원에 지원하게 되었고 이마저도 큰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좋았던 점은 학부생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감독 및 시험 채점 정도.
그러다가 1998년 12월 나는 대학원을 자퇴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학사편입학 준비를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준비한 끝에 학사편입학에 도전했는데 처음부터 불합격. 충격이었다.
미국 의대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어서 그랬다고 치지만 우리나라 의대 학사편입학도 안되다니.
불안함과 떨림 속에 몇 일이 지났고 다행히도 경희의대에 합격하여 드디어 내가 원하던 의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가 1999년 3월이니 내가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1993년 3월에 의대생이 되었을테니 6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난 것있다.
의대 본과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예과 2학년부터 해부학 및 골학을 공부했던 동급생들과는 달리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나는 의학 공부의 가장 근간이 되는 해부학에 아직도 자신이 없다.
또 다시 접하게 되는 우리나라식 주입식 교육, 그리고 '족보', '왕족', '칼족' 등에 익숙하지 않아 처음 몇 학기는 고생했다.
의대 졸업과 함께 나는 본교를 나와 삼성서울병원의 인턴에 합격했다.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막연했다.
알칸사 주립대 가정의학과 치프레지던트. 병동 입원 환자 회진 중에 찍은 사진
하지만 '킴' '논킴' '본교 출신' 등등에 밀려 나의 꿈은 입밖에도 내지 못하고 방황했다.
어쩌면 나의 인턴 성적도 그리 훌륭하지 못했으리라. 인턴이 끝날 무렵까지도 방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병리과 교수님들의 조언을 듣고 지원하게 되었다. 훌륭한 수련 환경이었음에도 나는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2년차 중반에 그만두게 되었다.
실직자가 되었다.
아니 갑작스레 인생의 나침반이 방향을 잃은 채 뱅글뱅글 돌아가고만 있었다.
나의 방황은 결국 3년이나 지속되었고 이 시간은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되었다(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
그러던 중 하늘이 내주신 마지막 기회라고 해도 무난할 정도로 2007년 12월 미국 알칸사 (우리나라식 표현은 '아칸소'라고 하지만 도저히 이런 발음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있다) 주립의대 가정의학과 치프레지던트와 전화 인터뷰를 하였고 2008년 1월에는 정식인터뷰에 초대되어 그 해 7월 1일부터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꿈만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미국에서의 수련 후에는 나의 선택에 의하여 캐나다 밴쿠버로 오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에서의 생활이 더 그립기도 하다.
내가 미국에서 살았다는 것도 그저 꿈만 같다.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지칠 때면 침대에 누워 그 때를 그리기도 한다.
현재 나는 밴쿠버 한인타운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하루에 진료 환자는 약 70명 안팎이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한다.
아마도 토요일에 일하는 캐나다 의사는 나밖에 없을 거라며 애써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원했던 의사의 모습이었나? 아직 답을 찾는 중이다.
어쩌면 내가 은퇴할 때까지 못찾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하루 한명 한명의 환자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다보면 혹시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두 권의 영어 학습 서적을 낸 경력도 있어 글작업에는 자신있어 했지만 오랜만의 컬럼은 나를 사뭇 긴장시킨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경력과 경험을 가지신 선배 의사들에 존경심을 표하며 나의 후배 의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컬럼의 첫 번째 문을 열어본다.
벤쿠버에서 가정의학과 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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