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우리나라 의료인은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 성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할 수 없다. 의료법 제20조 '태아 성 감별 행위 등 금지' 조항 때문이다.
해당 조항은 과거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성 선별 출산을 막기 위해 1987년에 제정됐으나 시대 변화에 따라 2009년 한 차례 개정됐다. 하지만 해당 금지 조항은 내용과 처벌 수위가 다소 줄어든 채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를 어긴 의료인은 면허 자격 정지 1년과 2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된다.
물론 최근에는 해당 법 조항에 따라 처벌받는 사례가 거의 없다. 하지만 시대 변화에 맞지 않은 법 조항에 문제의식을 가진 법조계를 중심으로 지난해 3월과 올해 2월 헌법재판소에 해당 ‘의료법 20조 2항 위헌확인’이 제출됐고, 현재 헌재는 2건을 병합해 심리 중이다.
의료계 역시 시대 변화에 따라 태아의 성별을 미리 인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인공임신중지와 연결되는 사례가 거의 없고, 해당 조항의 모순과 부작용이 큼을 지적하며 해당 조항의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한 차례 심판대 오른 '성감별 금지법'…헌재, "의료인 직업수행 자유·부모의 알권리 침해"
2일 의료계에 따르면 심판대에 오른 의료법 제20조 2항은 다음과 같다.
'의료인은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나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면서 알게 된 태아의 성(性)을 임부, 임부의 가족,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알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의료인이 태아의 성별에 대해 이를 고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이미 2008년 한 차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라는 결론을 받았다.
2005년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태아의 성별을 확인해 의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자격정지 6월을 명하는 처분을 받았는데, 이에 의사가 헌법소원을 청구한 것이다.
당시 헌법재판관 9인 중 8명이 해당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는데, 결정의 주된 이유는 인공임신중지가 의학적으로 어려운 임신 후반기까지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의료인의 직업수행의 자유와 부모의 태아성별 정보에 대한 접근을 방해받지 아니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보수적인 국회, '32주부터' 성 감별 허용토록 개정…법 어기면 1년 면허정지, 2년 이하 징역
하지만 당시 국회는 여전히 성 감별 고지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이에 따라 임신 후반기인 '32주부터' 태아 성별 고지를 허용하고, 법을 위반한데 대한 처벌을 면허취소에서 1년 면허자격정지, 3년 이하의 징역을 2년 이하로 완화했다.
당시 대한의사협회는 임신 28주 이후부터는 진료 과정에서 인지하게 된 태아의 성별을 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시기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경우 임부의 건강, 생명에 위험도가 매우 높고 실제 이 시기에 임신중지 목적으로 성감별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반면 유아용품 구입 등 출산준비를 위해 태아의 성별에 대한 확인 요구가 증가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태아성감별 고지 허용 시기에 대한 개정안 및 보건복지위원회 검토보고서에서는 임신 28주를 기준으로 삼았으나, 보건복지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32주로 변경된 채로 통과되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남아선호' 줄면서 선택적 출산 감소…입법 목적 사라져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시대에 맞지 않는 태아 성감별 고지 금지 조항이 폐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먼저 해당 조항이 생겨나게 된 배경인 '남아선호' 경향 자체가 감소하면서 태아의 성별을 미리 인지하는 것이 인공임신중지와 연결된다고 볼 수 없고, 출산율이 감소함에 따라 성별에 따라 선택적으로 출산을 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산의회는 "성선별 출산행위는 출산수준, 즉 기존의 자녀수와 성별 구성의 영향을 받는다"며 "한국사회의 성비 불균형 현상은 1980년대 중반에서부터 시작해 1990년 정점을 찍고 1993년 이후 점차 감소하여, 2010년대 초반부터는 자연성비에 도달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출산 순위와 관계없이 자녀 성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가임기(15~44세) 여성 1만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공임신중지를 한 임신주수는 평균 6.4주였고, 절반 이상(55.8%)이 4~6주(4주 19.9%, 5주 19.6%, 6주 16.3%)였다.
누적 비율로 보면 임신주수가 4주이하는 31.5%, 8주이하는 84.0%, 12주이하는 95.3%, 16주이하는 97.7%로 나타났다.
산의회는 "일반적으로 초음파를 이용한 태아성감별이 가능한 최소 임신주수는 16주로, 적어도 97.7%는 태아의 성별을 모른 채 인공임신중지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해당 조항을 통해 보호하고자 하는 입법목적이 상실됐다고 봤다.
성 감별 시 '의료인'에게만 처벌 "형평성 어긋나"
특히 산의회는 이처럼 태아 성감별로 인한 인공임신중지가 거의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별개로 태아 성감별 금지법이 갖는 모순점과 그 존재 자체가 갖는 부작용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산의회는 "현실적으로 태아의 성별 확인은 의료인이 아닌 부모가 원한다. 의료인이 아닌 부모의 이익 또는 희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먼저 의료인에게 태아의 성별을 확인·고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의료인이 이에 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런데 태아 성감별 금지법 위반은 '의료인'에게만 적용된다. 이처럼 부모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요구한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이익이 거의 없는 의료인만 처벌하는 것은 기존의 낙태죄와 비교하더라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지나치게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법리적인 공백도 크다. 즉 '의료인'이 아닌 이가 태아성별감별을 했을 때는 법에 저촉되지 않다"며 "임부가 자신의 태아 초음파 영상을 의료자료의 목적으로 받아 인터넷에 올려 초음파 영상 해독 능력이 있는 불특정 인물로부터 성별 정보를 얻는 경우가 실제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 경우 어떠한 법적인 문제도 없다"고 문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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