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번 주도 참 어렵고 힘겹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본래 이번 주에는 저희 대학에서 예방의학2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고, 저 역시 본과 4학년 학생들에게 '건강행태와 의료이용'이라는 주제로 4시간 강의를 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며 학부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여기에 다른 분들에게 드리는 당부를 더하여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1. 고마움과 미안함
전공의들과 학부생들에게 늘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의료정책을 강의한다고 하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와 함께 그 분야가 너무 방대하며 현장을 직접 경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젊은 세대의 생각과 미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 발표 이후, 젊은 세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주었고, 이는 정책적 오류를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 기성세대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사회적 지위 등 기회비용에 대한 우려 때문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젊은 세대가 행동할 수 있도록 묵묵히 빈자리를 메우고 정서적·심정적 지지를 제공한 일부 기성세대의 노력도 있었지만, 충분하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저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극한의 갈등 속에서, 저는 의료계 모든 구성원 간의 신뢰가 무너지는 상황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의료 공급자와 관리자의 신뢰 관계는 크게 훼손되었으며, 국민의 의료 공급자에 대한 신뢰 역시 무너졌습니다. 의료공급자 내부에서도 직역 간, 세대 간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정책 당사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미래를 위한 어떠한 변화도 이루기 어렵습니다.
2. 시간과 변화
의료계의 젊은 세대는 늘 어렵고 힘든 위치에 있었습니다. 도제식 교육의 피교육자이자 대형병원에서의 당직 업무, 입원환자 관리, 빈번하지만 힘든 술기와 행정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노동자라는 이중적 신분이 그들을 더욱 고단하게 했습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높은 수준의 의료 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공의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해 왔던 대형병원들은 전공의가 없는 환경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많은 통계가 상급종합병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의 생산성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공의가 떠난 자리는 전문의나 전문간호사(PA, SA)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비용 증가, 교육 기회 박탈, 의료 질 저하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 외에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던 이중적 신분에서 비롯된 정치적 힘이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전공의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되고 의료의 지속가능성을 해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전공의가 의료체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만약 5년, 10년 후 비슷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젊은 세대의 의견은 지금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와 최근의 의정 갈등을 비교해 보면, 의견 수렴의 속도와 방식에서 나타나는 큰 차이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의견이 의료정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는 아마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3. 완벽한 정책은 존재할 수 없다
초임 교수 시절, 의료관리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완벽한 의료체계'를 주제로 에세이를 제출하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약 40명의 글을 보면서 저 자신조차도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의료정책은 매우 달랐으며, 그 다양성 속에서 제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충분히 복잡한 체계 내에서는 반드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정책을 수립할 때 모든 이해관계와 목표를 충족시키며 내부 모순을 피하는 완벽한 해결책을 찾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경제학에서도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를 통해 모든 개인의 선호를 동시에 충족하는 사회적 의사결정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정책은 없습니다. 한 정책이 효율성, 형평성, 지속가능성 등 다양한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때 이들 간에는 필연적인 상충관계(trade-off)가 존재합니다.
4. 젊은 세대의 요구안
앞서 완벽한 정책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이 최근 제시한 요구안들을 좀 더 깊이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현재 전공의들은 7가지 요구안을, 의과대학 학생들은 8가지 요구안을 의정 갈등 상황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처음 이 요구안들을 접했을 때는 젊은 세대가 바라는 정책적 목표와 방향성에 대한 이해와 열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전환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요구는 너무 과감하고 급격하게 추진된 정책의 문제점과 이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적 조치 및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반성입니다. 이는 정책 내용 그 자체보다는 정책 추진의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입니다. 대표적으로 의료인력 수급 추계를 위한 독립적인 기구 설치, 수련환경 개선, 법적 보호 방안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요구들은 실제 정책으로 구현될 경우 의료계 내에서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세 번째 요구는 지속가능하고 이상적인 의료체계 구축을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필수의료정책 패키지의 전면적 철회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한 합리적 의료전달체계 구축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안들은 장기적 비전과 원칙을 제시하는 성격이 강하며, 현실적 정책으로 즉각 전환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안들을 실제로 해결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입니다.
첫 번째 요구인 정책 실패에 대한 정치적 사과와 반성은, 현재의 더 큰 정치적 문제들조차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 대한 극단적 표현에 대해서조차 정치적 반응이 미미한 상황에서 성사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책임을 질 주체가 명확하지 않고, 충분한 감정적 수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요구인 현실적 정책 문제 해결 또한 간단하지 않습니다. 의료인력 수급 추계만 하더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내부적 합의가 어렵고, 독립적 의사결정 기구에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도 법적·정치적 위험이 큽니다. 수련환경 개선, 상급종합병원의 구조적 변화, 전문의 고용 확대 등은 이론적으로 바람직하지만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동반하기에, 결국 의정 갈등이 사회 전반의 갈등 구조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 번째 장기적 정책 설계는 더욱 어려운 과제입니다. 불과 몇 년 후면 건강보험 재정 위기가 예상되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가 제안하는 정책들은 국민에게 더 큰 경제적 부담을, 기성 의료인들에게는 시장 축소를, 정치권에는 지지층 감소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이를 추진하기 위한 사회적·정치적 합의를 이루어내기는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될 것입니다.
5. 주제넘은 부탁들
제가 다른 분들에게 부탁을 드릴 자격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제넘게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두가 알고 계시듯, 현재 정치적 상황은 몇 주 이내에 큰 변화를 맞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의료정책의 최종 결정 권한을 갖는 정치적 주체가 결정될 예정이며, 이에 따라 의료계의 향방 또한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이 신속하게 내려지고 혼란이 조기에 종식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권력이 교체된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부양 갈등, 세대 갈등 등 보다 근본적인 갈등을 마주하고 있으며,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1) 정부 및 학교 당국자들께
지금은 정책적 의사결정을 내리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닙니다. 정치적 혼란이 이미 해소되었어야 하는 시점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으로 몇 개월은 불확실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학생들이 학업으로 복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압박이나 강요로 비춰져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젊은 세대가 기성 정치인들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며 감정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된 필수의료 패키지라는 포괄적 정책을 개별적인 사안들로 분리하여 재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긴 논의 과정이 요구되는 의료정책을 하나의 브랜드 아래 묶어 해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정책의 방향과 큰 계획은 필요하지만, 현재는 필수적이고 시급한 정책적 변화와 과도한 판단으로 인한 혼란이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개별 정책들은 독립적으로 접근하여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논의되는 정책은 '필수의료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의 부양 구조, 지속가능성, 의료체계 전반을 다루는 복잡한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어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2) 젊은 세대 여러분께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 상황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론을 맺게 될지, 그 끝을 각자가 진지하게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로 다른 세대와 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 속에서,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는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명확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세대 내부에서 상처를 주거나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은 부디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정부의 과감하고 급격한 정책 추진에서 비롯되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 주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가 분명한 의견 표명임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몇 주가 더 지난다고 해도 지금까지 겪은 어려움 이상의 피해가 추가로 발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몇 달 후에는 책임 있는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가 등장하겠지만, 그 주체 또한 사회적·정치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길지 않은 이 여유의 시간 동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적 제안들을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의료계를 책임지고, 사회적 보장체계를 유지하며, 다음 세대의 부모가 될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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