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23.07.02 15:12최종 업데이트 24.01.25 19:45

제보

우리나라 미생물학의 개척자들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㉗이유철 경북의대 명예교수(미생물학)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⑪김정용 대구 동구보건소장·전 개성공단 협력병원장
⑫이승재 경북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⑬채성철 경북의대 명예교수(순환기내과)
⑭정진향 경북의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⑮안동빈 경북의대 이비인후과학교실 주임교수 
⑯박순우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학장
⑰이원순 대구광역시의사회 명예회장
⑱박성민 대한의사협회 의장
⑲채종민 경북의대 법의학교실 명예교수 
⑳류형우 10대 대구예총 회장
손원수 경북의대 신경과학교실 교수 
박상운 대동병원 원장
김종연 경북의대 예방의학교실 부교수·대구광역시 공공보건의료지원단장
김재왕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 대의원회 의장 

장유석 경상북도의사회 대의원회 의장 
㉖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이유철 경북의대 명예교수(미생물학)

지난 2023년 5월 5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에 대해 내려졌던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해제한다고 선언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봉쇄를 촉발하고 글로벌 경제를 뒤엎고 세계적으로 최소 7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파괴적인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이 3년 4개월 만에 상징적으로 끝이 난 것이다. 약 100년 전(1918-1920)에는 세계인구의 1~3%인 1700만명에서 최대 50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스페인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감염병이 흔한 사망원인이었던 시대에 감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기초 연구에 헌신하신 분들이 우리대학의 세균학교실을 이끌어 오셨으며, 세 분 교수님의 발자취를 다시 조명하고자 한다.
 
최재규 교수(崔在圭, 1945~1960년 근무)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이 철수하면서 한국인이 교실을 맡게 됐다. 최재규는 1938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제6회로 졸업한 다음 세균학교실에 입실했고, 1939년 대구의학전문학교잡지에 “「ブレチビトメㅡタㅡ」 菌體沈澱子ニ渗透理論ノ適用“, ”Torell u. Stenhagen氏ノ萬能緩衝液ニ就テ, 特ニ其ノ色素反應用媒液成分トシテノ應用性“, ”種タナル腦下垂體後葉製劑ノ血壓ニ及ボス影響比較 第一報, 人體ニ及ボス影響比較(其ノ一)“ 등 3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그는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 의과대학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다. 1944년 나가사키 의과대학으로 옮겨 미생물학을 연구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해 대구의과대학의 세균학교실을 맡아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다.

최재규 교수는 1949년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콜레라균 신선분리주 배양 통과에 따르는 성상 변이(コレラ菌新鮮分離株の培地通過に伴う性状移変)“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의 교실활동 중 특기할 만한 것은 1946년 여름 대구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한 콜레라 대유행 시의 활약이었다. 비록 미비한 시설이었으나 의과대학생들이 동참해 환자와 보균자로부터 균을 검출하고, 예방접종 및 방역대책에 크게 기여했고, 분리균에 대한 세균학적 연구도 병행했다. 그 후 학생교실원이 중심이 돼 교실활동이 지속되다가 1949년에 이르러 정재규(鄭在圭), 우원형(寓元享)을 위시한 여러 명의 졸업생들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인적 보충이 이뤄졌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의과대학 본관이 징발되면서 임시교사에서 강의가 이뤄졌다. 1952년 4월 대구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국립경북대학교 개교에 따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재규 교수는 1952년 5월부터 1956년 2월까지 약 4년간 경북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4대 병원장을 맡게 됐고, 전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병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에서 기증받은 약간의 시설로 교실의 활동이 재개되면서 최재규 교수는 김중명 강사와 함께 한센병 환자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시작해 환자의 동태, 레프로민 반응 및 튜베르쿨린 반응, 그리고 한센균검사 등에 관한 수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1950년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에서 파견된 외국인의사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최재규병원장(중앙) 
1960년에 4.19 이후 극심한 학내 분규를 겪으면서 최재규 교수는 경북의대를 떠나게 됐다. 그는 1970년 11월에 신설된 충남대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72년 7월부터 1973년 8월까지 충남의대의 제 3대 학장을 역임했다. 1976년 2월에 퇴직 한 후 개인 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5년 5월 작고했다.
  
전도기 교수(全燾基, 1960~1981년 근무)

춘강(春岡) 전도기는 1917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후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40년 제8회로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세균학교실에 조수로 입실해 학문에 첫발을 딛었다. 주임교수인 아오키 요시오(靑木義勇)교수와 함께 1939년에 대구의학전문학교잡지에 “菌體抗原性物質媒液移行ト環境ノpH(「チフス」菌分析原ニ關シテノ實驗)” 논문을, 1940년에 Japanese Journal of Medical Sciences에 “Zur Bedeutung des Medium-pH bei der Extraktion antigener Baktienleibsstanzen (Experimente betreffs der analysierten Typhusbazillen Antigene)”을 발표했다.

그 후 1940년 12월에 나가사키 의과대학으로 유학해 해방이 될 때까지 5년간 부수(副手)로 세균학을 연구했으며, 1942년 “폐결핵에 있어서 Widal 반응, 특히 항원 분석적 견지에서의 검토”를 長崎醫學會雜誌에, “Experimentelle Studien über die Reaktinogenaviditat des Antigens von NA- KAMURA für seine sorfortige Reaktion auf Typhus und Paratyphus”를 Japanese Journal of Medical Sciences에 발표했다. 

해방이 되면서 귀국해 1945년 12월에 광주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발령 받았다. 1947년 4월 광주의학전문학교가 의과대학으로 승격됨에 따라 직제개편으로 조교수로 발령받았고, 1952년 6월 전남대 의과대학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1958년 10월부터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서리를, 1959년 5월부터 1960년 7월 까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60년 8월 모교인 경북대 의과대학으로 옮겨 세균학교실 주임을 맡았다. 의과대학에 China Medical Board(CMB) 원조가 본격화됨에 따라 매년 연구 장비가 충당됐고, 대학원 연구생 제도가 생기게 돼 외부로부터 연구생이 연차적으로 입실했다. 의과대학 학생교실원의 수도 증가해 연구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됐다.

1963년 동해안을 중심으로 El Tor 콜레라가 대유행하면서 학업이 일시 중단되는 시기가 있었다. 이때 전도기 교수는 의과대학생 40여명과 간호원으로 구성된 콜레라 만연지구 주민 대변 검사반을 구성해 오염지구인 포항과 울진에서 2만 여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콜레라 감염여부를 조사하였으며, 많은 검체로 부터 균을 분리했다. 그는 콜레라 방역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1963년 12월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가 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표창을 받았다.
 
콜레라 방역업무의 공으로 전도기교수가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전도기교수는 1963년과 1964년 두차례 일본미생물학회 초청으로 도일해 ‘Salmonella and Shigella in Korea’ 및 ‘장티프스균의 phage typing’을 발표했다. 1968년 7월부터 1969년 11월까지 미국 버팔로대학에 객원교수로 유학했다. 전도기 교수는 우리나라의 Vibrio parahaemolyticus의 분포에 관해 다각도로 검토했으며, 분리균에 대한 여러가지 성상을 규명해 이 분야의 연구에 좋은 지침을 제시했다. 1960년대에 세균학교실에서 발표한 논문은 모두 123편으로 그 당시의 연구환경을 고려할 때 양적 및 질적으로도 훌륭한 성과를 이뤘다.

1961년 12월 4일 경북대학보 연구실 탐방 2회를 보면, “쟁쟁한 의학박사 배출의 요람지, 완비된 시설로 연구열 상승”이란 머리글을 달고 전도기교수와 세균학교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국내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감염병인 이질균을 연구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한국 시겔라(Shigella) 센터 책임자로 지정받았고, 이질균에 대한 각종 연구와 함께 우리나라 세균성 이질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미육군성으로부터 2회에 걸쳐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인 6만3000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장내세균에 관한 중요한 업적을 완성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훌륭한 세균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1961년에 경북대 신문인 경북대학보에 소개된 세균학교실과 전도기 교수 

전도기 교수는 1966년 1월부터 1967년 5월까지 경북의대 학장을 역임했고, 1972년 4월부터 1973년 9월까지 대한미생물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학회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1973년 9월에는 미육군성 초청으로 일본에서 V. parahaemolyticus의 Kanagawa 현상에 대해서 보고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장내세균의 항생제 내성에 관심을 가지고, R plasmid 연구에 집중하면서 우수한 논문을 미국미생물학회에서 발행하는 저명한 잡지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전도기 교수는 정년퇴임을 1년 앞둔 1981년 3월에 신설 계명의대 학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계명대학교 초대 의무부총장겸 의료원장을 맡았다. 은퇴 후 잠시 동안 개인의원을 개원하였으며, 2010년 4월 작고했다.
 
1980년대 초반의 미생물학교실원들. 앞줄 중앙의 전도기교수와 시계방향으로 그 당시의 설성용교수, 이유철 조교, 서민호 조교, 그리고 조동택 교수

전도기 교수는 194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40년 이상을 장내세균과 항생제 내성학을 연구했다. 장염비브리오균의 성상, 시겔라균, 살모넬라균 등의 항생제 내성의 유전적 특성 분석에 관한 20편 이상의 논문을 그 당시에는 국내의 다른 의과학자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에서 발행하는 감염과 미생물학 분야 우수 잡지인 Antibiotics and Chemotherapy (현 Antimicrobial Agents and Chemotherapy), 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 Applied Microbiology, Journal of Immunology, International Archives of Allergy and Applied Immunology, Journal of Virology, American Journal of Tropical Medicine and Hygiene, Infection and Immunity, Journal of Clinical Microbiology, Tropical Medicine 등에 발표했다. 한국의학원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전도기 교수를 장내세균학을 개척한 우리나라 의학의 선구자로 선정했다. 

전도기 교수는 후학들에게 “국적있는 학자로서 이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으로 무엇이 절실한 연구과제 이겠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하고, 구미 여러나라의 물량 지원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연구과제를 분수넘게 추종하면 연구 결과가 의미있게 남는 것이 없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전도기 교수는 성품이 올곧고 겸허하면서, 세상에 나서기를 꺼리어 줄곧 연구에만 전념했고, 사교나 속세의 잡사와는 거리가 멀고 양명을 피한 분으로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기초의학자로서 출생지인 광주․전남과 의학교육을 받은 대구․경북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의학과 미생물학의 초석이 될 인력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도기 교수는 경북의대뿐만 아니라, 전남의대, 계명의대의 3개 의과대학의 학장과 세균학(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를 역임했으며, 경북대 대학원장(19785.2~1977.3)과 계명대학교 초대 의무부총장겸 의료원장(1982.9~1984.12)으로 맡은 중책을 잘 수행해 훌륭한 교육자 및 지도자적 삶을 살았다.

더불어 당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연구에 대한 열정과 국가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남다른 사명감으로 장내세균에 대한 연구와 함께 21세기 세균학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세균의 항생제 내성학 연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세균학자로 우리나라 미생물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이다.
 
전도기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해 후학들이 마련한 논문집 헌정식

 정재규 교수(鄭在奎, 1949~1979년 근무)

인제(仁齋) 정재규는 1923년 3월 24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1949년 대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세균학교실에 입실해 1979년 8월까지 30년을 경북대 의과대학에 근무하면서 미생물학교실 주임 및 경북의대 학장을 역임했다.

정재규 교수는 평생을 미생물학 교육과 연구에 헌신한 의학의 개척자로서 사회적 혼란기인 1949년에 미생물학에 입문한 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1961년에 결핵균의 항결핵제 내성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경북대학교 5호 박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를 보면 사회적으로 혼란기였던 입문기에는 결핵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국민 보건 향상에 의미있는 일을 수행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당시 연구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던 진균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1964년에 CMB fellow로 미국 듀크대학에서 1년간 진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미생물학 중에서도 불모지인 진균학 연구에 선구자로 활동하면서 SCI급 논문 5편을 포함해 모두 6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77년에는 대한미생물학회장을 맡아 학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1979년 9월 영남대 의과대학으로 옮겨 초대 영남의대 학장으로 부임한 다음, 1981년 3월에 미생물학교실이 창설되면서 주임교수를 맡았다. 그는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의 기반을 갖춘 후 1988년 8월 정년퇴임을 했다. 이후 1989년 2월부터 1999년 7월까지 약 10년동안 영남대, 영남대의료원, 영남이공대학을 경영하는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1984년에 계명의대에서 개최된 대한미생물학회. 맨앞줄 왼쪽으로부터 3번째 정재규교수와 5번째 전도기교수

정재규 교수는 숨가쁜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많은 모순과 암담한 날들로 점철되는 사회현실에 한점 오염되지 않고, 투철한 교직의 사명감으로 교육과 연구에만 매진하면서 경북의대 미생물학교실을 지켜왔다. 지역사회에 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의과대학을 설계하고자 신설 영남의대 초대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주위로부터도 인정받아 기초의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이사장을 10년간 수행했다. 대한민국의 미생물학 발전과 지역의료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정재규 교수는 2011년 10월 작고했다.
 
필자는 의학과 2학년이었던 1979년부터 학생교실원으로 미생물학교실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전도기 교수님과 정재규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시고 난 후에도 교수님들이 계시던 의과대학 본관 3층에서는 전도기 교수님이 논문작성에 사용하던 Smith-Corona 전동 타자기 소리와 진한 파이프 담배향이 느껴지며, 정재규 교수님의 나지막한 잔기침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필자 또한 2023년 2월에 정년퇴임을 하면서 45년을 지내왔던 경북의대 동인동 캠퍼스를 떠나게 됐다. 정년퇴임을 하신 이후에도 SCI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시던 은사님들의 열정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지금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여건에서 연구에 전념하시고, 보건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를 우수한 논문으로 발표해 학문적인 측면과 국민보건 관점에서 우리사회의 발전에 주춧돌 같은 역할을 하신 세균학(미생물학)교실의 선배 선생님들 덕분에 한국의 의료가 현재와 같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확신하며, 미생물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세분의 은사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메디게이트뉴스 (news@medigatenews.com)
댓글보기(0)

전체 뉴스 순위

칼럼/MG툰

English News

전체보기

유튜브

전체보기

사람들

이 게시글의 관련 기사